李, 루스벨트의 경제정책 놓고
“획기적 공산·사회주의적 정책”
실상은 자본주의 붕괴 막은 루스벨트
포퓰리즘 전선 확장 의도 아닌지 불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지난달 15일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연설을 하면서 미국의 32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화제에 올렸다. 이 후보는 “문재인 대통령이 루스벨트를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라고 했는데, 가장 존경하는 경제 영역의 정치인으로 저도 역시 루스벨트를 꼽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루스벨트가) 대공황 시대에 모두가 절망하고 미래가 암울할 때 당시로서는 정말로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운 ‘획기적인 공산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정책’들을 만들어서 강력하게 집행했다”고 덧붙였다. 루스벨트의 정책은 이 후보의 말처럼 과연 ‘획기적인 공산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정책’이었을까.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한 1933년은 사상 유례가 없던 심각한 대공황이 진행되는 와중이었다. 서너 집 건너 한 집꼴로 가장이 실업자였으며 거리에는 노숙인이 넘쳐났다. 이에 대한 긴급 처방으로 루스벨트가 내놓은 것이 실업자 및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대규모 공공사업과 복지제도 확충, 강력한 반독점 정책 등을 뼈대로 한 뉴딜정책이었다.
이 후보는 ‘경제 영역의 정치인’으로 루스벨트를 존경한다고 했다. 하지만 좁은 의미의 경제정책 측면에서만 보면 루스벨트의 정책은 실패작이었다는 평가도 많다. 루스벨트 행정부의 핵심이었던 헨리 모건소 재무장관도 하원 청문회에서 뉴딜의 실패를 자인하는 듯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이전에 없는 수준으로 돈을 썼지만 효과가 없습니다. 집권 8년이 지났지만 처음 시작할 때만큼 실업률이 높습니다. 게다가 부채도 어마어마합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1939년의 실업률은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기 전인 1931년보다 더 높았다. 역설적이게도 미국을 긴 대공황의 터널에서 구해낸 것은 1939년 9월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 물자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대공황의 원인이었던 ‘생산과잉-수요부족 문제’가 일거에 해결됐던 것이다.
하지만 뉴딜 평가에 인색한 경제학자들조차도 그가 보여준 불굴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존경을 아끼지 않는다. 루스벨트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단 하나는 두려움 자체일 뿐”이라며 국민에게 끊임없이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고, 친근한 노변담화를 통해 늘 정부가 국민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하지만 이런 평가만으로 루스벨트의 위업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1945년 루스벨트 대통령 부고를 접했을 때 미국 특파원에게 “언젠가 이 세상과 역사는 당신네 대통령에게 큰 신세를 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루스벨트가 집권한 시절은 경제공황도 경제공황이지만 볼셰비키혁명의 물결이 확산되면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자본주의가 존망의 기로에 서 있을 때다. 유럽에서 파시즘이 대두하게 된 것도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진정한 위업은 공산주의와 파시즘이라는 상반된 위협과 유혹으로부터 방향을 잃지 않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지켜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루스벨트의 정책이 ‘획기적 공산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정책’이라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인식이다.
뉴딜이 공산주의 정책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루스벨트가 직접 반박한 적도 있다. “우리의 정책을 공산주의라고 부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옳지 않은 지적이다. 우리의 정책 집행은 어느 특정 계층을 완전히 배제하거나 사적인 정당의 존재를 부정한 채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양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굳이 루스벨트의 경제정책에 이름을 붙인다면 ‘케인스주의’라는 공인된 이름이 있다. 그런데도 이 후보가 ‘획기적 공산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정책’이라는 딱지를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 후보는 자칭 ‘포퓰리스트’다. 대중적 인기에 도움이 된다면 오랜 시행착오와 숙의를 거쳐 자리 잡은 전통이나 제도를 갈아엎거나 공격하는 데 아무 주저함이 없다. 그는 이미 기본소득-기본주택-기본금융 등 기본시리즈 공약과 ‘음식점허가총량제’ 아이디어 등 수많은 반(反)시장적 제안들을 쏟아내 놓은 상태다. 이제는 루스벨트의 권위에 편승해서 ‘공산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정책’ 논란이 빚어질 수 있는 정책으로까지 자신의 ‘포퓰리즘 전선’을 넓히겠다는 의도는 아닌지, 불길한 예감을 지우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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