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에서 시작한 철기문화는 기원 전후로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도 꽃을 피운다. 농업 생산력이 획기적으로 개선됐고 크고 작은 정치체들이 등장했다. 3세기 무렵 마한, 진한, 변한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나라들이 바로 그 계승자다. 중국 역사책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마한에 54국, 진한과 변한에 각각 12국이 있었다고 한다. 서울 올림픽 열기로 뜨거웠던 1988년 초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던 변한 우두머리의 무덤 하나가 우연히 발견됐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크기와 구조를 갖춘 데다 도굴 피해를 입은 것이었기에 학계와 시민들은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쏟아냈다. 이 무덤을 통해 밝혀낸 우리 역사의 비밀은 무엇일까.
○ 2000년 된 통나무 목관
1988년 1월 하순. 국립중앙박물관에 제보 하나가 접수됐다. 경남 창원 주남저수지 주변의 다호리에서 중요 유물이 도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이건무 학예관은 곧바로 직원들과 함께 현장으로 향했다. 제보자가 지목한 곳을 멀리서 보니 평범한 논이었기에 저곳에서 중요 유물이 나왔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니 논바닥 곳곳이 파헤쳐져 있었다. 일행은 그 일대를 자세히 살피다가 도굴꾼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토기 조각을 발견했다. 연일 혹한의 추위가 계속됐지만 도굴된 유적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기에 1월 21일 곧바로 발굴을 시작했다.
윤광진 학예사가 큼지막한 도굴 구덩이 속에 들어가 꽃삽과 양동이로 흙을 제거했다. 그의 손길이 2m 깊이에 도달했을 때 가장자리를 따라가면서 도굴꾼이 흘리고 간 철기와 옻칠된 부채자루가 발견됐다. 철기는 형태로 보아 고식이었으며 적어도 2000년은 되어 보였다. 밖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조사원들은 모두 환호했다. 곧이어 구덩이 속에서는 놀라움과 환희가 뒤섞인 외침이 들렸다. “통나무 목관이 남아 있어요!”
모두들 일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토록 오래된 목관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샘솟았다. 도굴이 미완에 그쳤다면 목관 속에서 엄청난 유물이 쏟아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모두 기대 어린 눈빛으로 구덩이 속을 바라봤다.
○ 목관 밑에 숨겨진 보물 바구니
조사 현장은 분주해졌다. 서둘러 진흙을 제거하자 큼지막한 통나무 목관이 드러났는데, 일부가 도굴로 인해 부서졌음이 확인되면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목관을 정리했더니 유물 대부분이 사라졌고 철기 몇 점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목관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중요한 유물이기에 마음을 다잡고 수습하기로 했다.
목관을 수습하는 날. 기중기를 설치하고 목관을 견고한 끈으로 동여매는 등 준비를 마쳤지만 혹시나 들어올리는 과정에서 목관이 파손될까 우려했다. 작업 지시가 떨어지자 기중기의 체인이 감기면서 그 힘이 목관에 다다르자 육중한 무게의 목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무덤 속에서 또 한 번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쫙 깔렸습니다. 유물이 엄청 많아요.” 목관 하부에 유물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목관을 무덤 밖으로 안전하게 옮긴 다음 모두는 무덤 속을 주시했다. 그 옛날 하관할 때 쓰인 동아줄, 옻칠된 목기, 제사 지낼 때 뿌려진 밤톨과 율무까지 다양했다. 특히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타원형 바구니였다. 대나무 조각으로 엮어 만든 바구니 속에는 칼집에 든 동검과 철검, 중국 한나라의 청동거울과 동전, 붓과 손칼 등 많은 유물이 들어 있었다. 도굴꾼들이 목관 하부의 제사용 구덩이인 ‘요갱(腰坑)’의 존재를 몰랐기에 이 유물들이 온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 철을 매개로 한 국제 교역
다호리 통나무 목관에 묻힌 인물은 누구일까. 무덤에 껴묻은 유물을 통해 그의 활동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출토 유물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철기이다. 거의 모든 종류의 무기와 농기구가 출토되었는데, 주조괭이의 경우 제철소에서 출고된 후 한 번도 쓰이지 않은 듯 2개씩 끈으로 엮인 모습이었다.
잔존 길이 20cm 내외의 붓 5점과 자그마한 쇠칼은 무덤 주인공의 생전 모습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나무로 만든 붓대 표면에 옻칠이 되어 있고 붓털이 양끝에 모두 끼워져 있어 특이하다. 쇠칼은 나뭇조각에 글자를 쓰고 지울 때 사용하던 삭도(削刀)일 가능성이 있다. 이 학예관은 붓과 쇠칼에 대해 “2000년 전 변한에서 문자 생활, 더 나아가 문서 행정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결정적 자료”라고 해석했다. 함께 출토된 유물 가운데 청동 허리띠 버클, 오수전, 청동거울, 각종 칠기는 중국 한나라로부터 수입한 물품이다.
이들 유물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삼국지’에는 “변진(弁辰)에 철이 많이 나서 한군현에 공급하기도 하고 마한, 동예, 그리고 왜(倭)가 모두 와서 사간다”는 기록이 있는데 변진이란 변한의 일부일 것으로 보인다. 학계에서는 이 무덤 주인공이 철을 매개로 국제 교역에 관여한 인물로 보고 있다. 그가 활동한 교역장에서는 붓과 삭도가 필요했고 철과 맞바꾼 물품 가운데 한나라 허리띠 버클, 청동거울, 칠기 등이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 무덤에는 ‘다호리 1호묘’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후속 발굴을 촉발했다. 같은 해 3월부터 2차 발굴이 시작되었으며 그 이후 2012년까지 11차에 걸친 발굴에서 변한의 목관묘 151기가 조사됐다. 17호 묘에서는 철기 제작에 쓰인 쇠망치, 64호 묘에서는 6kg에 달하는 철광석이 출토되기도 했다.
영남지역에서는 2세기 후반쯤 목관묘가 사라지고 목곽묘가 등장하며, 그러한 문화가 바탕이 되어 진한과 변한이 각각 신라와 가야로 발전하는 양상이 확인된다. 그러나 다호리에서는 목곽묘가 발견되지 않았다. 다호리 1호분 주인공의 후예들이 묘역을 옮긴 것인지, 도태된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호리 세력이 주름잡던 변한 사회의 다양한 면모는 추가 발굴과 연구를 통해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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