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가려도 누가 썼는지 알 수 있는 글은 얼마나 될까? 고유한 스타일로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는 작가에게 최고의 칭찬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문예이론가 바흐친은 “문체가 있는 곳에 장르가 있다”고까지 말했다. 일찍이 누군가는 문체 연습만으로 이루어진 책을 만들기도 했으니, 바로 1947년에 프랑스에서 출간된 레몽 크노(1903∼1976)의 ‘문체 연습’(조재룡 옮김·문학동네·2020년)이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수학자, 번역가, 소설가, 시인이자 언어 실험을 극단으로 밀고 나간 스타일리스트. 레몽 크노는 ‘문체 연습’에서 하나의 짧은 이야기를 99개의 다른 문체로 썼다.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출근 시간 만원 버스에서 어떤 남자에게 화를 냈다가 두 시간 후에 다른 곳에서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는 그를 다시 만난다는 짧은 이야기. 그러나 시시해 보이는 이 줄거리는 서술자, 시제, 장르, 운율, 방언, 말투 등 요소를 변주한 99개 문체를 통과하여 다채로운 이야기 다발로 펼쳐진다. 투입하는 문체에 따라 다른 종류의 이야기가 출력되는 자판기, 혹은 흔들 때마다 다른 무늬의 소설이 고안되는 만화경.
‘문체 연습’이 영리하게 겨냥했고 성공적으로 증명한 바는 분명하다. 언어(형식)는 단지 이야기(내용)를 담아내는 투명한 그릇이 아니라는 것. 그 자체의 성격을 가지고 이야기(내용)를 조형하는 도구라는 것. 더 나아가 또 다른 이야기(내용)라는 것. 하지만 이 책의 의미가 내용 대 형식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는 온당한 명제, 혹은 문체는 개인에게 일대일로 귀속된 소유물이 아니라는 예상 가능한 결론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레몽 크노는 어느 연주회에서 감상했던 바흐의 푸가가 ‘문체 연습’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 음악 기법이자 악곡 형식인 푸가의 어원이 ‘도망가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fuga’인 까닭은, 기본이 되는 주제 선율이 다른 성부들에서 번갈아 모방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선율은 고정되지 않고 움직이며, 사라지지 않고 되풀이된다. 그러니 푸가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목소리가 규율에 따라 조금씩 변주되어 다른 성부에서 반복된다는 형식, 즉 성부 사이에서 주고받는 ‘대화’라는 형식이다. 작은 차이의 연쇄적인 반복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대화.
이 책이 넌지시 알려준 바에 따르면 문체 역시 그렇다. 책의 반이 넘는 분량의 자상한 해제를 쓴 번역가 조재룡의 표현을 빌리자면, 레몽 크노는 “제약과 잠재를 양손에 쥐고서” 아흔아홉 개의 역동적인 텍스트를 지었다. 형식의 제약을 받는 문체라는 얇은 막이 작은 차이를 만들어내고, 그 작은 차이의 반복이 무한히 증식하는 영원한 대화를 잠재한다. 그러니 ‘문체 연습’을 한마디로 소개하라면, 언어의 엄격하고도 자유로운 대화에 관한 아름다운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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