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만든 실용미[간호섭의 패션 談談]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10일 03시 00분


<62> 유틸리티 패션

1943년 유틸리티 의복을 입은 영국 여성. 사진 출처 영국 임피리얼 전쟁박물관
1943년 유틸리티 의복을 입은 영국 여성. 사진 출처 영국 임피리얼 전쟁박물관
간호섭 패션디렉터
간호섭 패션디렉터
현대 역사상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일 것입니다. 소중한 인명이 희생되고 자원이 부족해지며 그 결과 생각지 못한 결과물이 만들어지기도 했죠.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이 각각 만들어졌고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하며 국제 질서가 재편됐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원자폭탄 같은 무시무시한 무기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전쟁 중 탄생한 패션도 그 결과물 중 하나입니다. 가을 패션의 대명사인 ‘트렌치코트’도 전쟁 중 탄생했습니다. 1차 대전 때 발명돼 2차 대전 때까지 실용성을 인정받은 이 옷은 트렌치(Trench)가 전장에서의 참호를 뜻하듯, 혹독한 기후의 참호 속에서 비바람과 추위를 견디는 실용 패션, 즉 유틸리티 패션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트렌치코트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탐정과 형사를 대표하는 패션으로 사랑받는 패션 아이템이 됐습니다.

학생들이 즐겨 입는 ‘더플코트’ 또한 전쟁이 만든 실용 패션입니다. 거친 모직 소재에 커다란 모자가 달리고, 여밈으로 ‘토글’이라는, 뿔처럼 생긴 나무장식을 끈으로 잠그는 이 코트는 영국군 수장이던 몽고메리 장군이 즐겨 입어서 ‘몽고메리 코트’라는 애칭도 있습니다. 재밌게도 우리 학생들에게는 토글 장식이 떡볶이를 닮았다고 해서 ‘떡볶이 코트’라고 불립니다. 전쟁 영웅의 이름을 딴 실용 패션은 또 있습니다. 연합군 총사령관이었고 후에 미국 대통령까지 된 아이젠하워 장군이 즐겨 입은 ‘아이젠하워 재킷’은 실용성을 중심으로 재킷과 점퍼의 장점을 결합했죠. 동작 편의를 위해 재킷 길이를 허리선까지 짧게 하고, 가슴에 큼지막한 포켓을 만들어 다양한 수납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나중에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의 아이템으로 발전했습니다.

아예 “나 실용 패션이야!”라고 선포하듯 그 자체가 이름이 된 ‘유틸리티 의복’도 있습니다. 물자 부족으로 정부 통제 아래 옷감 절약을 목표로 만들어진 의복입니다. 스커트 길이를 무릎 길이로 하고 큰 폭의 칼라나 멋내기용 커프스 사용을 배제했습니다. 활동성을 위해 스커트에는 주름을 넣었으나 그 폭이나 갯수 등도 제한했으며, 단추도 6개 이상을 넘기지 못하게 해 물자 절약의 표본이 됐습니다. 그 와중에도 색상 변화, 그리고 모자나 핸드백 같은 액세서리 활용으로 패션성을 잃지 않았죠. 1940년대 당시 스타였던 배우 데버라 커를 홍보 모델로 기용해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처럼 전쟁 중에 이런 놀라운 결과물이 탄생하기도 합니다. 패션의 속성이 인체 보호라는 실용성 추구인지 미의 추구인지는 늘 논쟁거리이지만 전쟁이 만든 유틸리티 패션은 이 두 가지를 다 가진 실용미의 결과물이네요.

#전쟁#실용미#유틸리티 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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