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싶을 땐 훌쩍 버스를 탔다. 밤새 원고를 마감한 어느 아침에도 나는 버스를 탔다. 무작정 처음 가는 미술관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지도에 의지해 길을 찾아 들어간 미술관. 평일 한낮의 미술관은 고요했다. 음악도 없는 조용한 공간에 머문 적이 언제였더라. 이상하고 낯설고, 조금 두렵기까지 했다. 창가에 어른거리는 빛조차 그림처럼 느껴질 정도로 나는 예민해졌다. 계단을 올라가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도슨트의 해설을 듣고 있었다.
“그림 색채가 참 아름답죠? 네온사인, 학종이, 무지개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희망차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은 그림일 것 같지만요. 정말 그럴까요? 여기 가까이 와서 그림을 들여다보세요.”
도슨트의 말에 모두들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다채롭게 얽힌 구조물과 가짜 식물들이 어지럽게 어우러진 인공 풍경화. 도슨트는 작가의 이력과 화풍을 소개하며 그림에 담긴 비판적인 메시지를 설명해 주었다. 이런 의미가 숨겨져 있었구나.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도슨트의 해설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이야기였다. 다른 작품 해설을 듣지 못한 걸 아쉬워할 때, 이어진 도슨트의 마지막 말이 인상 깊었다.
“안내를 마치며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예술을 볼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낯섦을 견디는 능력’이 아닐까 싶어요. 사실 여러분이 작품들을 제대로 감상하고 싶으시다면 도슨트의 설명을 먼저 들으시면 안 돼요. 아무것도 모르는 낯선 상태에서 천천히 주의 깊게 살펴보고 내 안에 일어나는 느낌을 먼저 찾아보세요. 예술가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다르게, 아름답게 보여주면서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어요. 그 말을 알아듣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해설은 가장 나중에요. 여러분이 그렇게 전시를 감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도슨트 덕분에 나는 한나절 여행하듯 미술관에 머물렀다. 천천히 걸어 다니며 그림을 마주 보고, 보았던 그림들도 다시 돌아보았다. 다른 관람객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우리는 둥글게 걸으며 여러 번 마주쳤고 오래 그림 앞에 머물렀다. 작품은, 작가는, 예술은, 세상은,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알아듣기 위해서는 자주 멈추고 오래 생각해야 했다. 어렵지만 기꺼이 낯섦을 견뎌보며. 내가 그날 미술관에서 알아들은 말들이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잘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그날의 미술관, 공기, 소리, 조도, 심지어는 머물렀던 타인들까지 선명한 걸 보면, 여행지의 어떤 기념품보다 오래 간직될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나는, 옳은 답이 아니라 다른 답을 찾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