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시절이었으며 최악의 시절이기도 했다’라는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도입부는 영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다. 그뿐 아니라, 내가 최근 고향 영국에 다녀온 상황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완벽한 문장이기도 하다. 10월 초부터 양국 간 입국자는 백신 접종을 마쳤을 경우 자가격리 의무가 해제돼서, 나는 큰마음을 먹고 비행기표를 끊어 2년 만에 고향으로 날아갔다.
영국은 7월부터 ‘위드 코로나’ 정책을 시행했는데, 돌아다니다 보면 코로나19 위기가 있었는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코로나 이전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마스크를 쓴 사람을 찾는 게 정말 어려웠다. 한국에서는 마스크를 안 쓰면 눈치가 보이는 반면에 영국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하는 사람이 눈치를 보는 슬픈 현실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인사로 악수도 하고 볼에다가 뽀뽀하기도 한다. 축구장에 가보니 응원도 예전처럼 목청 높여 했다. 어디를 가도 거리 두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마음이 매우 착잡했다. 별걱정 없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좋은데, 과연 진정한 일상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매일 새 확진자가 3만 명 이상 나오고 예방접종 완료자 중에서도 무증상 감염자도 많다. 영국에서는 QR체크도 없어서 이동 동선 파악도 안 되고 접촉자도 파악이 안 되니까 실질적인 수치가 훨씬 더 높지 않을까 싶다. 한국에 귀국하려면 반드시 코로나 테스트 음성 결과를 제출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자가격리를 의무적으로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겁이 나 거의 나가지 못했다. 이런 시점에서 이번 영국 방문은 최악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번 영국행은 가장 좋았던 방문이기도 했다. 2년 만에 가족을 다시 만났고, 그동안 꿈도 꾸지 못한 ‘엄마 집밥’을 실컷 먹을 수 있어서 살이 몇 킬로그램이나 쪄서 한국에 돌아왔다. 출국 때 짐이 별로 없었던 덕에 영국 과자를 많이 사오는 기회도 누릴 수 있었다.
한국에 15년 동안 살면서 2년 가까이 영국을 찾지 못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통 6개월 만에 영국을 찾아도, 그 사이 나에게나 영국에 여러 변화가 있는데 2년 만의 방문이라 그런지 이번에는 그 변화가 아주 크게 느껴졌다. 마트에서 좋아했던 음식 몇 가지가 사라졌다. 단골로 다녔던 식당이나 가게 중에 폐업한 곳도 생겼다. 옛날에는 영국에서 내 사이즈에 맞는 옷을 종종 사왔는데 이제 사이즈가 맞아도 패션 취향이 안 맞아서 살 게 없었다. 유행어 중에도 모르는 것이 많았고, 인기 문화콘텐츠 중에 아는 것이 ‘오징어게임’밖에 없었다!
사실 이것은 큰 변화다. 이제 영국은 ‘위드 코리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코리아에서 산다고 하면 “북한이냐 남한이냐” 물어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한류 덕분에 이제 그런 질문을 받는 일은 없고, 오히려 “부럽다”고 하는 사람이 꽤 많다. 한국 문화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음반 가게에는 BTS를 포함한 K팝 상품이 많다. 그뿐만 아니라 각 대형마트 수입품 코너에서는 라면, 김치, 고추장 등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도시마다 한식당이 적어도 하나씩은 생겼다. 과거 영국에서 한식당에 가면 내가 거의 유일한 백인이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한국인은 거의 없고 한식을 마구 먹는 영국인들의 모습만 눈에 띄었다. 일반 영국 음식점에서도 한국 영향을 받은 퓨전 음식을 많이 팔기 시작했다.
글로벌리즘으로 인해 세계가 확실히 작아지고 있다. 한국에서 영국 물품을, 영국에서 한국 물품을 구매하기 점점 더 쉬워지고 있다. 반면에 나와 모국인 영국의 연결고리는 확실히 약화되고 있다고 느낀다. 영국에 눈에 띄게 한국의 흔적이 늘고 있는 시기에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이 참 아이러니다. 서로 문화를 교류하는 시기에 나는 한국과 영국의 중간에 낀 느낌이다. 그래도 서로 관심이 있어 뿌듯하긴 하다. 특히 그동안 한국에 대해 무지했던 영국이 한국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으니까. 한국에 대한 영국의 관심이 더 늘길 바라는 욕심에, 디킨스의 다른 작품 ‘올리버 트위스트’의 명대사를 인용해본다. “좀 더 주시면 안 될까요(Please, Sir. I want som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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