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이재국의 우당탕탕]<60>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12일 03시 00분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로 시작하는 노래를 들으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중 3때 펜팔 친구로 만나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매주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눴던 친구. 그 친구의 편지가 있어서 사춘기도 버틸 수 있었고, 그때 그 감성 덕분에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내가 주말에 편지를 써서 월요일 학교 가는 길에 빨간 우체통에 넣고 가면 인천에 사는 그 친구가 수요일에 편지를 받았고, 그 친구가 목요일 아침 우체통에 답장을 넣으면 토요일에 편지가 도착했다. 그렇게 한 주도 안 빼놓고 스무 살까지 편지를 주고받았으니 우리는 정말 서로에게 소중한 친구였다.

나는 친구라는 감정을 넘어 그 친구를 이성적으로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는 주말에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함께 놀이공원도 갔다. 한 번은 이문세의 ‘옛사랑’이라는 노래가 나오는 걸 듣고 레코드숍으로 달려가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그 친구에게 선물해주고 버스에 올라탔는데, 왜 첫사랑이 아니고 옛사랑을 선물했을까 하고 자책한 적도 있었다.

우린 스무 살이 됐고 나는 그 친구에게 내 마음을 고백하고 싶어서 꽃다발을 사들고 그 친구가 다니는 대학교 앞으로 찾아갔다. 우린 신촌에 있는 허름한 막걸리집에 가서 술을 진탕 마셨다. 그 친구는 아껴둔 속마음을 꺼냈다. “우리 집… 이민 가, 캐나다로. 나는 싫다고 했는데, 미안해.” 뭐가 미안한지 모르겠지만 그 말이 오랫동안 나를 울렸다. 우린 그날 새벽까지 술을 마셨고 첫차를 기다리다가 그 친구가 문득 물었다. “우린 우정일까? 사랑일까?” “난… 사랑이라고 생각해.” “우리 처음 만난 게 열여섯 살 때야. 사랑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아?” 그때 버스가 왔고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한 채 버스에 올라탔다. 그 친구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삐삐 인사말에 자신의 캐나다 주소와 전화번호를 남겨뒀지만 나는 끝내 연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잊고 살던 어느 날,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토이의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이라는 노래가 나오는데, 그 친구가 생각나서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끝난 인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얼마 전, 한남오거리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처음엔 누군지 몰라서 한참을 바라봤다. “나야!”라는 말 한마디에 30년 가까이 된 추억이 되살아났다. 우리는 폭풍 수다를 떨었다. “너 작가 됐다며?” “어떻게 알았어?” “궁금해서 여기저기 물어보고 찾아봤지. 넌 작가 될 줄 알았어.” 우린 세월에 보답하듯 거나하게 취했고 택시를 기다리는데 그녀가 또다시 그 얘기를 꺼냈다. “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우린 우정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아직도 그 얘기야?” “나한테는 중요하단 말이야. 너 때문에 내 첫사랑에 대한 정의가 늘 흔들린단 말이야.” 그때 택시가 왔고 나는 그녀를 먼저 태워 보냈다.

지난 주말 라디오에서 토이의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 노래가 나오길래 아내에게 “자기는 이 노래 들으면 생각나는 사람 없어?”라고 물었다. “잠시 산 게 뭐가 중요해?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이 중요하지.” 그래, 지금 곁에 있고,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이 제일 중요하지.

#친구#사랑#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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