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1975년 하길종 감독이 만든 영화 ‘바보들의 행진’을 보았다. 청바지와 생맥주로 상징되는 당시 청년 문화의 단면을 볼 수 있었는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이 배우들의 억양이었다. 말투가 요즘과 다르고 서울말이라기보단 북쪽 억양과 비슷했다. 개봉 당시에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는데 지금 그렇게 들리는 것이 신기했다. 말투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 방식도 그사이 많이 달라졌다. 시대가 바뀌면 삶의 형식도 바뀐다. 내용이 형식을 지배하고 형식은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우리의 주거 형식도 그런 흐름 속에서 변화해 왔다.
특히 아파트라는 주거 형식은 1970년대 말부터 21세기를 넘어온 50여 년 동안 우리 삶을 지배했다. 아파트는 건축이며 물리적인 공간이지만 그 전에 ‘모던 리빙’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자 상징이었다. 사람들이 꿈꾸는 아파트에서의 삶은 단지 생활의 편의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제 경제적 가치 외에 그런 상징으로서의 효용은 거의 끝나고 있다는 것을, 일선에서 일하는 건축가로서 자주 실감한다.
아파트가 도시를 뒤덮기 시작하고 ‘바보들의 행진’이 나온 무렵인 1976년, 일본에서는 우리와 반대의 사건이 일어났다. 안도 다다오(安藤忠雄·80)라는 당시 30대 건축가가 오사카 스미요시라는 동네에 작은 주택을 하나 지었는데, 그 집이 일본 주거사의 중요한 변곡점 역할을 한 것이다.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8명이나 나온 일본은 건축 선진국이라 부를 만한데 그중 대표적인 건축가가 안도 다다오다. 노출 콘크리트 붐을 일으켰고 미니멀한 공간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일본의 정신이 깃든 전통 주거 방식을 콘크리트라는 현대 재료로 번안하고, 공간을 현대적인 삶이 가능한 방식으로 전환한 건축가다.
오사카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는 독학으로 건축을 시작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공업고 기계과를 졸업하고 막연히 건축설계가 하고 싶어서 책을 읽고 해외 유명 건물을 보러 다니며 공부했다. 스무 살 무렵 대학 건축과 교재로 수련을 하던 그는 오사카 도톤보리에 있는 헌책방에서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집을 발견한다. 당시 바로 살 수 없었기에 그 책을 헌책방 구석에 감춰 놓고 수시로 드나들다 몇 달 후 샀다고 한다. 그러고는 책을 수십 차례 읽고 그림들을 외울 정도로 그리고 또 그린다. 그런 치열함 속에서 그는 건축이라는 생소한 분야에 들어섰다. 사실 아무런 배경이나 경력 없는 20대 초반 젊은이에게 누구도 건축설계 일을 맡길 리 만무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동네 낡은 집 주인을 찾아가 고쳐주겠다고 하거나 새로 지을 집의 계획안을 만들어 제시하곤 했다고 한다. 그렇게 지은 집이 ‘스미요시 나가야’다.
스미요시(住吉)는 지명이고 나가야(長屋)는 폭이 3m 남짓이고 안으로 10m 이상 들어가는, 전면은 좁고 안쪽으로 깊은 일본의 전통적인 도시 주거 유형이다. 아즈마라는 사람을 위해 지은 ‘스미요시 나가야’는 폭 3.6m, 깊이 14.4m의 전형적인 나가야 형식이다. 안도는 목조로 된 전통적 나가야를 콘크리트라는 재료를 통해 아주 모던한 방식으로 재탄생시켰다. 건축을 제대로 배우고 많은 집을 지은 노련한 건축가가 아니라, 건축을 독학하고 현장실무를 통해 익힌 30대 건축가가 일본 주택의 흐름을 바꿔 놓게 된 것이다.
그것은 아주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일본의 집들은 원래 표정이 없다. 골목 풍경은 우리와 다를 것 없지만 집 밖으로 가족의 두런거림이나 시끌벅적함이 풍겨 나오는 우리와 달리, 일본의 골목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집들이 덤덤하고 조용하게 모여 있다. 스미요시 나가야는 그런 일본의 집을 극단적으로 현대화한 것이다. 오사카 서민 동네 시타마치(下町)의 좁고 답답한 나가야에서 나고 자란 안도의 기억과 공간감이 그곳에 스며들어 있다.
오사카의 어느 골목길 안쪽, 주변 나가야들과 높이만 같은 콘크리트 박스로 된 집이 하나 있다. 이 집 전면 1층에는 직사각형 구멍이 하나 있을 뿐이다. 거실과 가운데 중정이 있고 건너편에 주방이 있다. 2층에는 중정을 사이에 두고 침실 두 개가 있는데 그 사이에는 얇은 다리가 있다. 집이라기보다는 나가야로 상징되는 일본 주거문화를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한 것 같다.
스미요시 나가야에는 좀 더 서구적인, 구체적으론 미국을 본받고자 하던 당시 사회 풍토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다. 안도 다다오는 20대 초반 미국을 두 번 방문했다. 그는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며 세계 최강국의 엄청난 풍요를 목격한다. 그리고 “대량소비 사회의 일상에 주눅이 들면서도 국토도 자원도 생활 습관도 다른 일본이 (미국을) 흉내 내려고 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 자각은 건축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진다. “모던 리빙 이미지 역시 미국의 산물이다. 비좁은 일본 땅에서 그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가 있다. 조금 더 덩치에 어울리는 생활, 좁으면 좁은 대로 이 땅에 어울리는 풍요를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83쪽)
‘스미요시 나가야’는 젊은 건축가의 치기 어리고 용감한 작업이 아니라, 일본 전통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현대에 적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결합된 집이다. 이 집을 볼 때마다 우리는 단절된 전통을 지금의 삶에 맞춰가기 위해 건축가가 해야 할 역할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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