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미국의 베스트셀러 ‘메이드 인 차이나 없이 살아보기(A year without “Made in China”)’는 오늘날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미중 패권 경쟁의 영향을 앞서 보여준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한 프리랜서 기자가 남편에게 중국산이 아닌 선글라스를 사주기 위해 안경점 대장정에 나선 건 시작에 불과했다. 중국산 제품을 피하기 위해 10달러짜리 대신 70달러짜리 신발을 사야 했고 그나마도 2주일이라는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2000년대 중반 미국의 한 중산층 가정이 체험했던 ‘웃픈’ 에피소드는 지구를 강타한 심각한 현실이 됐다. 2000년대에 이미 “서방의 마녀사냥이 절대 중국산 제품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호언장담했던 중국은 이제 “한국, 미국은 중국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며 대놓고 위협하고 있다. 중국산 장난감을 못 사 떼를 부리는 아이는 어르고 달래면 되지만, 중국산 요소수를 구하지 못하면 물류망이 마비돼 나라 경제 전체가 타격을 받는 게 아닌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차이나 리스크는 갑자기 닥친 쓰나미가 아니다. 중국은 2000년대 들어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투자도, 수입도, 수출도 빗장을 걸 수 있다는 걸 꾸준히 드러내 왔다.
산업계 관계자만 고민하면 되는 문제로 여겨졌던 차이나 리스크는 요소수 사태를 겪으며 온 국민의 민생 문제가 됐다. 원료비, 물류비가 저렴한 중국산에 요소수 원료 97%를 의존했던 현실은 한국의 대비가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드러냈다. 실리콘, 마그네슘, 염화칼슘 등 싸다는 이유로 중국에 의존하는 품목 어느 하나라도 공급난이 벌어지면 타격이 요소수보다 덜하리란 보장이 없다. 우리가 매달려 봤자 “한국이 위기를 겪는 건 자업자득으로 우리와 무슨 관계인가”라는 반응이 돌아올 뿐이다.
요소를 확보하기 위해 최근 정부와 유관 기관들이 우당탕거리며 급조한 대응책은 든든하기보다 걱정이 앞선다. 이런 임기응변으로는 경제 산업 안보를 지킬 수 없다. 저렴한 중국산이 주는 이득을 내려놓는 건 고통스럽더라도 피할 수 없는 숙제다. 원자재 공급처 다변화 없이는 경제 발전과 산업 안보 모두 놓칠 수 있다. 가격 경쟁력은 더 이상 기업 경영과 산업 정책의 제1변수가 될 수 없다는 게 냉혹한 현실이다.
어쩌면 요소수 사태는 한국 경제에 백신이 될 수 있다. 이번 기회를 발판으로 근본적 체질 변화에 성공한다면 장기적으로 글로벌 공급망에서 한국의 지위를 높일 수 있다. 반도체, 배터리 등에서 중국 투자를 제한하고 핵심 설비에서 중국산을 제외하려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흐름은 한국이 올라타야 할 기회다. 중국에 편중된 원자재 공급처를 다변화하면서 새로운 틀을 짜는 작업은 20세기 석유 에너지 안보를 확보하려던 결기 이상의 각오를 갖고 단단히 준비해야 하는 중차대한 국가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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