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는 시작부터 ‘큰 정부(big government)’ 행보를 보였다. 공공 부문 일자리를 81만 개 만들고, 슈퍼 재정으로 수요를 진작하려 했다. 공공 고용과 재정 규모로 정부 크기를 재는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기준으로 볼 때 현 정부는 큰 정부의 범주에 일단 든다.
이달 21일 문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 행사에선 현 정부의 일처리 방식을 보여주는 단면이 나온다. 한 소상공인이 빈 상가에 자영업자가 들어가 장사하도록 연결해주면 좋겠다고 제언하자 문 대통령이 즉석에서 진단과 해법을 내놓은 것이다. 먼저 공실의 원인과 관련해 대통령은 점포주들이 공실이 많아도 임대료를 낮추지 않고 그냥 비워두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임대료가 내려가지 않는다는 이 분석은 정확하지 않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전국 소규모 상가의 공실률은 최근 2년 동안 0.6%포인트 오른 반면 같은 기간 소규모 상가 임대료는 6.8% 떨어졌다.
빈 점포를 놀리지 말고 상인에게 연결해달라는 소상공인의 말은 절박함에서 나온 하소연일 것이다. 대통령이 그 말을 그대로 옮겨 공공임대 방안을 검토해 보겠다고 공언한 건 하소연에 대한 공감을 넘어 국가 기관을 움직이게 하는 일이다. 최소 2개 이상의 부처가 유탄을 맞았다. 한 부처는 “그게 우리 부처 일인가”라고 반문했고, 다른 부처는 “부드럽게 추진해야 할 일이어서 다양하게 검토 중”이라고 했다.
현재 거론되는 대안은 공공이 빈 점포를 사서 임대하기, 공공이 시세에 빌린 뒤 싸게 재임대하기, 임대료 제한하기 등이다. 부처 반응이 미온적인 건 대안들이 하나같이 현실에 바로 적용하기 어려워서다. 공공이 빈 상가를 매입한다는 소문이 나면 점포주들이 재빨리 가격을 올리려 할 것이고 임대료를 제한하면 ‘사회주의 경제냐’는 말이 나올 것이다. 모 부처가 2014년부터 관련 제도를 검토했지만 실제 추진하지 못한 데는 이런 속사정이 있다. 지금 부처는 상가 가격이 오를까 봐 공론화도 못 하고 있다. 비밀 작업 끝에 갑자기 ‘착한 임대’ 운운하는 정책으로 포장돼 나올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현 정부가 큰돈을 쓰고도 성과를 내지 못하는 건 일처리 방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지난 4년 반 반쪽짜리 진단으로 정책을 설계하고 부작용이 생겨도 밀어붙이기를 반복했다. 이런 악순환은 실패에 책임지기는커녕 엉뚱한 논리로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사후적 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종합부동산세가 1.7%만의 세금이어서 문제될 게 없다는 인식은 최저임금도 못 받는 장애인 비율이 미미하면 방치해도 그만이라는 말과 다를 게 없다.
지금은 큰 정부의 세상이다. 고령화, 기후변화, 4차 산업혁명 등 위기와 기회가 복합된 시기 정부 역할은 커질 수밖에 없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최신호도 세계는 ‘큰 정부의 새 시대(a new era of big government)’로 들어서고 있다고 했다. 이에 따르면 복지국가나 큰 정부는 세금을 보편적으로 걷고, 투자에 우호적이고, 민첩하고 효율적이어야 한다.
현 정부는 고소득자와 대기업에 세금을 집중하고, 투자보다는 분배에 꽂혀 있고, 환경 변화에 느리고, 평판과 명분에 매달린다. 이런 정부에는 큰 정부라는 타이틀이 아깝다. 그렇다고 포퓰리즘 정부라고 부르는 건 ‘고정적인 지지 기반을 넘어서 폭넓게 호소한다’는 포퓰리즘의 격을 떨어뜨린다. 이 정부의 정체성을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