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범 금융위원장이 싫어하는 경제용어가 ‘펀더멘털(기초체력)’이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 정부 고위관료들은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괜찮다’고 큰소리를 치다가 그해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당시 재정경제원 경제정책국 종합정책과의 30대 서기관이던 고 위원장은 이후 ‘펀더멘털’을 입에 담길 꺼린다.
‘외환위기 2030세대’는 경제가 무너지면 어떤 고통을 겪는지 절감했다. 하지만 24년이 흘렀는데도 청년 취업난은 미완의 과제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이 막대한 세금을 쓰고도 해결하지 못한 건 ‘펀더멘털 관료들’처럼 위기 원인을 외면하고 진통제 처방을 남발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일자리가 사라진 건 세계화로 공장이 다른 나라로 넘어가고, 자동화로 기계가 사람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냥 놔두면 중산층 일자리인 제조업과 서비스업 일자리는 남아나기 어렵다. 그나마 남은 일자리는 불공정 경쟁으로 힘 있는 이들이 독식한다는 게 청년들의 불만이다. 이 세 가지 난제에 해답을 내놓지 못한 청년공약은 시간과 세금 낭비일 뿐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중산층 일자리를 빼앗아간 주범으로 세계화와 세계화주의자(Globalist)를 지목하고 무역장벽을 세워 흐름을 되돌리려다가 동맹국 반발까지 샀다. 후임 조 바이든 대통령은 동맹 복원과 국제기구 복귀 등을 약속했지만 다른 나라 공장을 미국으로 끌어오는 데도 적극적이다. 글로벌 법인세 공조로 세금을 깎아 일자리를 뺏어간 나라를 견제한다. 글로벌 분업체계가 무너진 탈세계화 시대엔 이런 식의 국가 간 일자리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다. 한국 대선 후보들은 어떻게 기업을 유치하고 지킬 건지, 국가 간 일자리 경쟁엔 무엇으로 대응할지 별말이 없다.
과거엔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하면 취업난이 해결될 거라고 했는데, 그 자리는 젊은이가 아닌 자동화된 기술로 대체되고 있다. 미국은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교육을 강화해 일자리를 만들고 지킨다는데, 미국보다 대학 진학률이 높은 한국은 취업자 절반이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하는데도 교육 개혁에 손을 놓고 있다. 수요가 급증한 반도체 인력을 육성한다며 다른 학과 정원이 줄면 그 정원으로 돌려 막으라는 식이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컴퓨터공학과 정원은 미 스탠퍼드대가 2008년 141명에서 지난해 745명으로 늘었다. 서울대는 55명에서 70명으로 늘리는 시늉만 했다. 한전공대와 같은 지역 공대를 하나라도 더 세우려고 해도 중복 투자라고 난리다.
세계화와 자동화 해법은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대선 후보들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조차 손을 놓고 있다. 청년들이 분노하는 일자리 불공정 게임의 규칙을 바로잡으려면 그들의 솔선수범이 필요하다. 대선 후보들이 당선 이후 캠프에 모여든 어중이떠중이 낙하산을 최대한 배제하고 진영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공정하게 쓰겠다는 약속부터 하면 어떤가. 프랑스 청년들은 요즘 자신들을 “희생당한 세대(G´en´eration sacrifi´ee)” “취업 불안, 경기 악화 등으로 사회 전체의 부채를 짊어져야 하는 세대”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한국판 ‘희생당한 세대’를 만들지 않으려면 지난 20여 년간 청년들의 젊음을 갈아 넣어 만든 득표용 청년공약부터 걷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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