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을 닦는데 소파 밑에서 도토리가 굴러 나왔다. 떼구루루 반가운 기억과 함께. 지난가을엔 커다란 참나무가 있는 카페테라스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 나무 바닥에 도토리가 떨어지는 자리였다. 똑 또르르르. 소리가 들리면 아이들이 달려가 도토리를 주워왔다. 큼지막한 내 외투 주머니에 하나둘 도토리를 모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자 다글다글 도토리가 만져졌다. 이게 뭐라고. 웃음이 났다. 주머니 불룩하게 도토리를 줍다가 바작바작 낙엽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던 저녁. 별거 아닌 순간이 참 행복했다.
말하자면 도토리 같은 행복이었다. 쓸모를 구하지 않아도 귀엽고 즐거운 것들. 별거 아니어도 소소하게 좋은 순간들. 가만 보면 도처에 그런 행복이 굴러다니는데 줍지 않고 그냥 지나쳤던 건 아닐까. 그렇담 올해가 가기 전에 도토리를 줍는 가벼운 마음으로 도토리 같은 순간들을 주워보자고, 랜선 글쓰기 모임을 만들었다. 일상에서 반짝이는 순간들을 찾아 기록하는 모임이었다. 가을이 끝날 때까지 채팅과 화상모임으로 우리는 여러 번 만났고, 저마다 주워온 도토리 같은 날들을 나누었다.
갓 구운 크루아상을 사는 아침. 쌀쌀한 바람에 꺼내 입은 첫 스웨터. 조용한 도서관에서 책 읽는 시간. 불현듯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는 라디오. 건너는 길목마다 초록불로 바뀌는 횡단보도. 편한 운동화를 신고 걷는 산책. 보송보송 잘 마른 빨래들. 무릎 위에 잠든 고양이.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걷는 두 사람. 숲에 누워 올려다보는 하늘. 발그레 목욕하고 나온 아이를 껴안아주는 저녁.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는 차가운 맥주. 두꺼운 솜이불을 목까지 끌어 덮고 자는 밤. 모두에게 하루에 하나씩은 있었다. 도토리를 줍는 저녁처럼 단순하지만 선명하게 행복을 느끼던 순간들이.
도토리를 한 움큼 주워 집으로 돌아왔던 날, 아이들과 도토리를 굴리며 놀았다. 놀다 보니 데굴데굴 어디론가 사라져 도토리는 반쯤 줄었고, 아이들은 아쉬운 기색도 없이 깔깔 웃다가 도토리 몇 알 머리맡에 두고 잠들었다. 한동안 생각지도 못한 구석에서 도토리를 발견했다. 그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기뻤다.
다람쥐가 먹으려고 묻어두고선 깜빡 까먹은 도토리들이, 겨우내 땅속에 있다가 싹이 나고 나무가 되고 참나무 숲이 된다지. 어쩌면 우리가 주웠던 행복한 하루도 앞으로의 많은 날들에 묻혀 기억나지 않을지 모른다. 좋은 건 깜박 잊어버리고 불평하며 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따금 발견하는 도토리 같은 작고 귀여운 소소한 기억들이, 끝내 우리를 살게 할 것임을 안다. 인생은 그런 평범한 매일들로 울창해지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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