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정권요구나 정파이념에서 벗어나야
스스로 선택하는 고교학점제 공감하나
학교 책임 대신 학습생태계부터 조성해야
우리나라는 학교 교육과정에 관한 기본 사항을 교육부 장관이 정하는 ‘국가 교육과정’ 체제를 따르고 있다. 국가 교육 비전과 미래 학교 청사진이 담겨 있고, 모든 학교가 따라야 한다. 대학 입시에서는 더 큰 힘을 발휘한다.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내용과 대학수학능력시험 과목 편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과정 개정은 다른 정책과의 정합성, 학교의 준비 정도를 살펴서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 내년에 만들어질 국가교육위원회의 사무로 교육과정 개정에 관한 사항을 포함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정권의 요구나 정파의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회적 합의에 따라 긴 안목에서 준비하라는 것이다.
지난주 교육부는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 주요 사항’을 발표했다.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디지털 소양을 갖추게 하고, 학교의 자율성을 신장하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2025년 전면 도입한다는 ‘고교학점제’이다. 학생의 적성과 진로를 존중하는 맞춤형 학습 시대를 열겠다는 것이고 바람직한 방향이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정책을 대통령 임기 말에 급하게 추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정책의 엇박자이다. 교육과정이 개정되면 대입 제도가 개편돼야 한다. 교과 선택을 강조하는 고교학점제는 학생이 들은 과목과 성취 내용을 평가하는 수시 전형에 부합하는 정책이다. 하지만 정부는 얼마 전까지 반대 정책을 밀어붙였다. 대입 공정성을 이유로 수능 위주 정시 전형을 40%까지 늘리라고 했고, 대학들은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한쪽에서는 정시 선발을 확대하면서, 다른 쪽으로는 수시 선발과 관련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입 제도 개편은 다음 정부로 떠넘겼다.
지난 역사를 보자. 2014년 박근혜 정부는 ‘2015 개정 교육과정 총론 주요 사항’을 발표했다. 창의융합교육을 저해하는 문과, 이과 제도를 혁신하는 교육과정으로 사회적 호응이 컸다. 하지만 이번처럼 대입 제도 개편은 다음 정부로 넘겨졌다. 그 결과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2022년 수능 시험 체제에서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의 취지는 희석됐고 고교 교육 혁신은 물거품이 되었다. 고교학점제도 같은 길을 걸을까 우려된다. 학부모와 선생님들도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모양이다. 중간에 낀 학생들만 실험 대상이 됐다.
학교의 준비 정도는 더 큰 문제다. 학생의 교과 선택권을 확대하려면 진로 교육이 필수다. 하지만 학교당 진로전담 교사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다양한 선택 과목을 가르칠 선생님은 충분한가. 현장에서는 선생님들을 급하게 부전공 교육을 시켜 투입하려 한다는 불만이 나온다. 그렇다고 학교 밖 전문가가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도 아니다. 공간도 걱정이다. 선택 과목이 다양해지면 교실도 늘어나야 하는데 교과교실제도 정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 다른 공사를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시범학교만 무작정 늘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여러 정책이 깊이 얽혀 있는 교육 분야는 핀셋이 아닌 패키지 처방이 필요한 분야다.
학교 만능주의를 경계한다. 교육에서 자율과 창의는 중요한 가치다. 배울 내용을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고교학점제의 취지에 공감하는 이유다. 하지만 이를 정규 수업만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은 경직적인 생각이다. 교육 환경과 학생의 흥미는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학교와 선생님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기보다 다양한 학습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육과정이란 본래 모든 학생이 공통으로 배워야 할 내용과 수준을 정한 것이다. 학교 선생님은 핵심 교과를 제대로 가르치고, 학생의 들쭉날쭉한 흥미와 진로는 학교 밖 다양한 학습자원까지 동원하는 방과후학교를 활용하면 어떨까. 민간 교육 전문가를 폭넓게 활용하고 대학, 연구기관 등 지역사회와 협력하기도 용이하다. 교육문제를 학교와 정규 수업만으로 해결하려는 협소한 관점으로는 미래 교육에 대비하기 어렵다.
교육과정 개정은 현장 적용까지 10년 이상이 걸리는 긴 여정이다. 대입 제도 개편과 연계되어야 하고, 물리적 공간이나 교원 문제까지 종합 검토해서 차분히 진행해야 성공할 수 있다. 선택의 확대는 격차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소규모 학교 대책도 잘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 공약 1호라는 중압감에 조바심을 가져서는 실패할 수 있다. 공약을 지킨 대통령을 원한다면, 조급하게 밀어붙이기보다 제도의 토대를 튼튼하게 닦는 것이 현명하다. 오래가는 정책은 정권의 욕심이 아니라 사회적 공감대와 지지에서 나온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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