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카운티 북부의 한 대로변을 찾았다. 도로 전체가 공사로 한창이었다. 근처의 대형 고속도로와 동네 국도를 잇는 진입로를 건설하기 위해 서너 대의 굴착기가 쉴 새 없이 땅을 파고 있었다. 인부들 또한 바쁘게 현장을 오갔다. 한 히스패닉계 인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터진 후 거의 일을 하지 못했는데 최근에 다시 시작했다”며 “곳곳에서 공사가 많아 일을 할 기회가 더 많아질 것 같다”고 했다.》
지난달 5일 미국 의회가 1조2000억 달러(약 1440조 원) 규모의 ‘인프라투자 및 일자리 법(IIJA·Infrastructure Investment and Jobs Act)’을 통과시키면서 최근 미국 전역에서는 도로 항만 교량 상수도 건설, 인터넷망 구축 사업 등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1930년대 루스벨트 행정부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뉴딜’ 정책을 폈던 것처럼 조 바이든 행정부 또한 코로나19 팬데믹을 이겨내고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굳히기 위해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전체가 거대한 공사판으로 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최강대국의 낙후된 현실
미국은 21세기 들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에 천문학적인 국방비를 지출하는 바람에 정작 국내에는 많은 예산을 쓰지 못했다. 넓은 국토를 보유해 50개주 곳곳에 행정력이 미치기 어려운 상황에서 투자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인프라 상태가 낙후됐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하는 인프라 분야 경쟁력 순위에서 미국은 141개국 중 13위(2019년 기준)에 머물고 있다. 1위인 싱가포르, 2위 네덜란드에 이어 일본(5위) 한국(6위) 독일(9위) 아랍에미리트(12위)보다도 떨어진다. 분야별 성적표를 보면 전기 공급 인프라와 상수도에서 23위, 철도 분야에서 48위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백악관의 분석 또한 다르지 않다. 백악관이 지난달 내놓은 인프라 현황 자료에 따르면 미국 내 고속도로와 주요 도로의 약 20%, 전체 길이로는 17만3000마일(약 27만6800km)에 이르는 도로 상태가 열악한 것으로 판정됐다. 보수가 필요하다고 분류된 교량 또한 4만5000개에 달했다. 보수가 필요한 버스는 2만4000대, 기차는 5000대, 기차역은 200개로 집계됐다.
공항과 항만의 효율성 또한 심각한 수준이다. 미국 내 공항은 세계 상위 25위 국제공항에 단 한 곳도 포함되지 못했다. 미국 항만 역시 세계 상위 50위 안에 한군데도 포함되지 못했다. 4년마다 한 번씩 미국의 인프라 상황을 점검해 등급을 매기는 미국 토목학회는 3월 발표한 올해 평가에서 미국 인프라 시설을 ‘C―’로 매겼다. 4년 전 ‘D+’보다 조금 낫지만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돈 따내기’ 경쟁도 치열
낙후된 인프라와 국내 투자 부족, 이에 대한 미국인의 불만은 2016년과 2020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주창한 ‘미국 우선주의’가 힘을 얻은 주요 이유로 꼽힌다. 인프라투자 법안은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바이든 행정부가 현 상황을 완전히 바꾸겠다며 추진한 대표적 야심작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특히 이 법안이 코로나19로 침체된 경제를 활성화하고 일자리를 늘리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아직 최종 통과되지 못한 사회복지 법안 등과 함께 향후 10년간 최대 매년 15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 백악관의 계산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법안이 내수 경기 부양에 도움이 되도록 공사에 필요한 자재는 미국산을 우선 사용할 것을 지시하는 행정명령에도 서명했다.
1억2000만 달러 중 가장 많은 1100억 달러는 도로와 교량의 보수 및 신규 건설에 쓰인다. 철도(660억 달러), 대중교통(390억 달러), 공항(250억 달러), 항만(170억 달러) 등에도 상당한 돈이 책정됐다. 브로드밴드 등 초고속 인터넷망 투자에도 650억 달러를 투입한다.
바이든 행정부의 역점 사업인 기후변화 대응에도 상당한 돈이 쓰인다. 버스 여객선 등 화석연료 비중이 높은 대중교통에 청정에너지를 사용하는 데 75억 달러가 투입된다. 또 다른 75억 달러는 미국 전역에 전기차 충전소 50만 개를 새로 짓는 데 쓰인다. 지역별로는 50개 주 중 각각 인구 2위와 1위 주인 텍사스주와 캘리포니아주에 가장 많은 돈이 할당됐다.
50개 주정부, 건설업계, 법률회사, 로비회사 등은 1조2000억 달러라는 막대한 돈을 타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워싱턴의 대형 법률회사 넬슨멀린스에서 건설 분야 자문을 맡고 있는 로버트 앨퍼트 파트너 변호사는 “건설, 엔지니어링, 회계 등 관련 업계의 주요 회사 및 기관들은 인프라 법안 통과 전부터 물밑 작업을 활발하게 시작했다”며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했을 때부터 인프라 법안 등을 통해 많은 돈이 풀릴 것이란 예측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中 견제까지 노리는 다목적 투자
대규모 인프라 투자는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정책 핵심 목표인 중국 견제와도 맞물려 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의 관세 부과 및 제재 등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미국의 본질적 경쟁력을 확 높여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겠다는 의도다. 바이든 대통령 또한 지난달 뉴햄프셔주 연설에서 “인프라 법안이 통과되면 미국의 인프라 투자가 20년 만에 중국을 앞선다”며 반드시 법안을 통과시켜 내수를 부양하고 중국 또한 견제하겠다는 뜻을 강조했다.
브루킹스연구소에 따르면 중국의 인프라 투자 순위는 현재 전 세계 36위를 기록하고 있다. 순위 자체는 높지 않지만 국내총생산(GDP) 대비 투자 금액은 미국을 훨씬 앞선다. 미국은 이번 인프라 법안 통과 전까지 GDP의 불과 1.2%만 인프라에 투자했다. 반면 중국은 5.6%를 투자하고 있다. 특히 첨단 정보기술(IT) 분야의 투자는 미국을 훨씬 앞선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중국에는 이미 3만5000km의 초고속 철도망이 깔려 있고, 2035년에는 지금의 두 배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채드 본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중국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관세를 더 많이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자체의 비즈니스와 인적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프라 투자뿐 아니라 미국 노동자의 사회안전망, 급변하는 글로벌 경제 환경에 적응하도록 돕는 체계 등도 중국보다 뒤떨어진다며 미국 사회 전체가 대대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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