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경로사상 실종, 인구구조도 한몫
초고령사회 속 노인 배려 여력 사라져
들러리 아닌 경청 대상으로 청년 바라봐야
젊은층 활기 생겨야 노인도 대접받아
여러 해 전 이른 아침에 아버지와 함께 지하철을 탄 적이 있다. 조카가 서울의 큰 병원에서 작은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수술 전에 손주를 꼭 보고 싶어 했다. 노인을 모시고 지하철을 타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고집이 센 분이었고 나는 대개 그랬듯이 아버지 고집을 이기지 못했다.
꽤 이른 아침 시간이었는데도 지하철에는 빈자리가 전혀 없었다. 경로석은 등산복 차림의 노인들로 만원이었다. 건강을 과신하는 아버지는 서서 가도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나는 당황해서 빈자리가 없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때 건너편 노약자석에 앉아 있던 젊은 여성이 아버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노약자석에 앉아 있던 걸로 봐서 아마 임신부였을 것이다. 우리는 몹시 미안했고, 아버지는 그날 이후 다시는 지하철을 타지 않았다.
한국에서 경로사상이 사라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일본에 비하면 여전히 노인을 대접하는 사회다. 도쿄에 살면서 나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를 거의 보지 못했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노인을 본 적도 별로 없다. 노약자석은 항상 젊은 직장인 차지였다. 나는 경로사상이 실종된 것처럼 보이는 일본 사회에 혀를 찼었지만 등산복 차림의 노인분들이 출근 시간에 좌석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한국과 일본의 노인 대접이 다른 것을 단지 문화의 차이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인구구조의 변화에도 이유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14% 이상이면 고령사회로 본다. 일본은 1994년에, 한국은 2018년에 고령사회가 되었다.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로 본다. 한국은 지금 초고령사회 초입에 있고 일본은 이미 2005년에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이제 일본은 65세 이상 인구가 20세 미만 인구의 두 배인 사회가 되었다. 노인을 배려하고 싶어도 이 사회에는 여력이 없다. 오히려 여력이 있는 노인들이 고령자, 장애인, 외국인, 청소년 등을 위한 자원봉사자로 나서고 있다.
몇 해 전 어느 빌딩에서 나가는데 앞서 가던 노인분이 내게 문을 열어 주며 내가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서 줬다. 자기보다 젊은 사람을 위해 문을 열어주고 동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배려가 낯설어서 당황했다. 고령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청년도 기특하지만 자기보다 젊은 사람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노인은 더 멋있구나, 감탄했다.
내가 은퇴할 때 즈음이면 한국이 지금 일본 정도의 초고령사회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도 젊은이를 위해 문을 열어주는 노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인생의 경험을 무기로 젊은이를 훈계하려 들기보다는, 그들로부터 새로운 세상을 배우고 싶다. 인공지능도 사물인터넷도 그리고 메타버스도 그들이 나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고 훨씬 더 잘 활용한다. 그러나 젊은 세대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해만이 아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례 조문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 젊은 세대가 우리 세대보다 그리고 우리 윗세대보다 낫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를 생각해서 박 전 시장의 빈소를 찾지 않겠다는 장혜영, 류호정 의원을 진보 진영의 선배 정치인들은 호되게 꾸짖었다. 그러나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여론이 불리해지자 그제야 마지못해 피해자에게 사과했다. 홍준표 의원은 그를 지지하는 청년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전 전 대통령 조문을 포기했는데 조문에 반대한 청년의 대다수는 피해자의 고통을 이유로 들었다. 박 전 시장에 대한 조문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며 맹렬히 비난했던 보수 진영 정치인들이 이번에는 조문을 가지 않는 것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 젊은이들이 피해자의 고통에 함께하려 한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대선을 앞두고 여당도 야당도 청년 표를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청년을 영입하고 그들을 홍보한다. 대선 후보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정치인 어른들은 정말 청년의 목소리를 경청하려는 것일까, 다만 일회용 들러리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든다. 청년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어른이 많아져야 청년에게 활기가 생기고, 청년이 살아야 노인도 대접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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