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다만 흐르는 추이를 알 뿐이고, 개념이 이 추이를 가로질러 예리한 경계를 지운다.”
―독일 법철학자 구스타프 라드브루흐의 ‘법학의 정신’ 중
법은 실생활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해결하는 실용적인 것이지만, 법학 자체는 난해한 개념학문이다. 정치한 개념 정의가 학문의 시작이자 끝이다. 개념으로 중무장한 법률가는 칼 같은 사람들이다. 같은 사안이라면 ‘내로남로’나 ‘내불남불’만 허용된다. ‘내로남불’은 법률가 머릿속에는 있을 수 없다. 유효 아니면 무효, 유죄 아니면 무죄다. 사랑 아니면 불륜, 정의 아니면 불의다. 사랑하면서 미워할 순 없다. 이것이 법의 존재 이유다. 세상은 대단히 복잡하고 모호해서 누군가 ‘이것이 정의다’라고 선언해 주지 않는 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그러나 이 지점이 곧 법의 한계이기도 하다. 인간은 결코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따위로 구분되고 개념 정의될 수 있는 간단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법을 배우며 세상의 이치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했지만,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법은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저 지탱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 무엇으로도 인간의 삶을 명확히 정의할 수 없다. 세상은 정확한 묘사가 불가능한 거대한 흐름이다.
법률가로 살며 라드브루흐의 말을 이해하게 됐다. 우린 인생의 추이만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이조차 쉽지 않다.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불의의 흐름에 쓸려버린다. 오랫동안 법정에서 지켜본 바로, 구체적 전투에서 선은 악에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큰 흐름에서는 선에도 승산이 있다. 선은 대의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끊임없이 방향을 모색하고 머물지 않는 것이다. 선과 정의를 향한 추이를 잃어버릴 때, 거기가 바로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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