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다. 몇 주 전부터 계절 변화가 느껴질 정도로 온도차가 분명해졌다. 계절의 근무교대라고나 할까? 가을 팀장이 퇴근하고 겨울 팀장이 출근하는 바람에 하루 만에 20도나 하락했으니 말이다. 갑자기 추워져 집집마다 보일러 온도가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게 됐고, 재미있게도 보일러 때문에 부부 간 옥신각신하는 ‘썰’이 내가 속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도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냉전(Cold War)’이라는 표현을 아실 것이다. 세계대전 후 반세기 이상 지속된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서양에서는 며칠간 말도 안 하고 차갑게 지내는 일종의 부부싸움을 일컫기도 한다. 오늘은 냉전과 상반되는 ‘열전(Hot War)’ 현상을 소개하려 한다. 먼저 정의부터 내려보면, 특히 다문화 가정에서 겨울에 보일러 온도를 두고 벌이는 전쟁 정도가 될 것 같다. 다음 사례는 이 열전에 ‘참전’했던 영국 용사의 보고를 각색해 인용한 것이다.
전투 작전 개시일. 새벽 2시, 온도 24도. 브라이언(가명)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깬다. 두꺼운 겨울용 솜이불 아래는 가위 눌릴 듯 숨 막히고 공기는 사우나만큼 뜨겁다. 멀찍이 떨어져서 잠자는 부인은 춥다는 잠꼬대를 하면서 데굴데굴 굴러 브라이언 곁에 꼭 붙어 다시 잠에 빠진다. 브라이언은 ‘마눌님’의 팔을 살포시 풀고, 사하라 사막에서 물 없이 지낸 것 같은 타는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냉장고로 향한다. 오아시스가 잠깐 펼쳐진다.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물을 마시고 다시 정신을 차린 브라이언은 살금살금 보일러로 향한다. 온도는 이제 21도. 비밀 임무는 대성공이다.
전투 이틀째, 새벽 6시, 온도는 21도. “아 추워! 당신이 보일러 내렸어?” 짜증 섞인 목소리에 잠을 깬 브라이언. 살을 에는 듯한 아내의 손톱이 옆구리를 파고든다. 군대에서 적의 신문에 저항하는 훈련을 받지 못한 이름뿐인 영국 병사 브라이언은 금방 고백한다. “자기야 너무 덥다.” 그의 애처로운 부탁에도 보일러 온도는 24도로 다시 세팅된다.
전투 이틀 반째, 시간은 밤 11시 30분, 온도는 24도. 브라이언이 침대에 누워 멀뚱멀뚱 눈을 뜨고 뒤척거린다. 브라이언은 겨우 잠이 들지만 악몽에 시달리다 다음 날 아침 아내가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자 잠에서 깬다. 온도는 여전히 24도지만 모든 창문이 열린 아파트 실내 온도는 훨씬 낮게 느껴진다.
비슷한 전투일지를 계속 써내려 갈 수 있지만 독자 여러분들은 이미 상황 파악이 끝나셨을 것이다. 가정마다 적정 온도가 다를 수 있겠지만 다문화 가정에서는 이런 상황이 비일비재한 것 같다. 다문화 가정에서 열전이 더 자주 일어난다고 보는 첫째 이유는, 17년간 직간접으로 한국 가정을 관찰한 결과다. 한국에서는 실내복과 실외복이 상이하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조금 얇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는 일이 많은데 심지어 겨울에도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이 많다. 영국에서는 난방비를 절약하려고 긴 청바지에 스웨터를 입는 게 일반적이다.
둘째, 천재적인 난방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온돌은 바닥을 뜨끈하게 데운다. 그런데 영국은 벽난로나 라디에이터 같은 온풍시설을 사용해 집안 온도가 들쑥날쑥하다. 그래서 거실은 따뜻하지만 부엌은 여전히 추운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셋째, 영국에선 약간 추운 듯 지내는 것을 더 선호한다. 내가 살던 영국 동네 쇼핑센터에서는 “더운 여름 저희 쇼핑몰에서 21도 시원한 온도로 쇼핑을 즐기세요” 혹은 “추운 겨울 저희 쇼핑몰에서 21도 따뜻한 온도로 쇼핑을 즐기세요” 하는 안내판을 흔히 볼 수 있다. 영국의 아동용 가이드에는 ‘아기방 온도를 18도로 유지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국 가정의 실내온도는 23∼25도인 경우가 더 많은 듯하다. 부가적으로, 영국에서는 보통 타이머로 기상 30분 전부터 난방이 가동되도록 하는데, 낮 동안 약간 따뜻한 정도이고 밤 시간엔 난방이 잠깐 정지되는 효과가 있다. 한국에선 타이머 기능을 사용하는 가정이 흔치 않고 오래된 아파트는 중앙난방시스템으로 온도 조절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1∼2도 온도차는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이고, 이 열전이 이혼 사유가 돼선 더더욱 안 되겠지만 겨울마다 일어나는 다문화 가정의 다양한 ‘열전’은 골치 아픈 일임에 틀림없다. 모쪼록 브라이언 같은 외국인 용사들이 덥고도 추운 타국에서 연말을 슬기롭게 지내길 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