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유적에서 고구려 토기가 나온 이유[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2월 21일 03시 00분


충북 청원군(현 세종시) 부강리 소재 남성골산성 일대에서 출토된 높이 33.3cm의 토기. 몸통이 길쭉하고 입술이 밖으로 벌어진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다.
충북 청원군(현 세종시) 부강리 소재 남성골산성 일대에서 출토된 높이 33.3cm의 토기. 몸통이 길쭉하고 입술이 밖으로 벌어진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장수왕은 서기 427년 왕권을 강화하고 고구려의 새로운 도약을 기약하며 평양천도를 단행했다. 학계에선 평양천도의 이유 가운데 하나로 남진(南進)을 지목한다. 장수왕은 서북방 선비족 왕조들과의 대결에 신경을 쓰면서 긴 호흡으로 남진을 준비했고 기회를 엿보다가 단 일격에 목표를 이뤘다. 475년 82세 고령임에도 그는 친히 군사 3만을 이끌고 백제 왕도(王都) 한성을 공격했다. 승부는 오래지 않아 결판났다. 백제는 한성을 잃었고 개로왕은 참수됐다.

삼국사기에는 장수왕이 “남녀 8000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고만 기록돼 있을 뿐 그 이후 한강 유역이 누구의 차지가 됐는지, 또 백제와 고구려 국경이 어디였는지 등에 관한 정보는 담겨 있지 않다. 따라서 475년 이후 두 나라를 둘러싼 역사는 미스터리로 남겨졌다.

1979년 충주고구려비가 발견되면서 수수께끼가 풀리는 듯했으나 비석 건립 연대에 관한 논란이 벌어지면서 관련 연구 진척이 더뎌졌다. 그러던 차에 1990년대 후반부터 중부지역 곳곳에서 고구려인이 웅거했던 성책, 고구려인이 묻힌 무덤들이 속속 발굴됨에 따라 475년 이후 두 나라 사이의 역사가 차츰 해명되기에 이르렀다.

○ 웅진성 겨눈 고구려군 전초기지
1994년 대전 월평동 소재 건설공사 현장에서 유적이 발견됐다. 포클레인에 의해 유적이 훼손되는 모습을 목격한 한 시민이 신고해 발굴이 실시됐고 그 과정에서 여러 시기에 걸쳐 조성된 삼국시대 방어시설이 드러났다.

초반에 관심을 끈 것은 목곽고였다. 마치 지하벙커처럼 땅을 파고 그 속에 나무로 방을 만든 것인데 나무가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진흙으로 가득 찬 내부를 조심스레 노출했더니 나무 사다리, 각목 다발, 말안장, 양이두(羊耳頭)와 함께 다량의 백제 토기가 출토됐다. 양이두란 가야금이나 거문고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품이다. 조사원들은 이 유적을 백제인들이 만든 것으로 단정하며 조사를 이어갔다.

그런데 능선 정상부의 한 구덩이 속에서 백제 토기와 형태나 색조가 다른 고구려 토기 몇 점이 드러났다. 백제 유적에서 왜 고구려 토기가 출토된 걸까. 의문은 곧 해소됐다. 북쪽 능선에서 고구려식 성벽이 확인된 것이었다. 고구려군이 대전까지 내려와 성을 쌓고 주둔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충주 탄금대토성에서 출토된 길이 30cm 내외의 철정(덩이쇠). 토성 내 저수시설을 인위적으로 폐기하며 함께 묻은 것으로 보인다. 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철정은 화폐로도 쓰였다.
충주 탄금대토성에서 출토된 길이 30cm 내외의 철정(덩이쇠). 토성 내 저수시설을 인위적으로 폐기하며 함께 묻은 것으로 보인다. 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철정은 화폐로도 쓰였다.
2001년 금강변에서 유존 상태가 좋은 고구려 산성이 발굴되면서 월평동산성을 둘러싼 수수께끼도 함께 풀렸다. 충북 청원군(현 세종시) 부강리 소재 남성골산성 일대가 도로 공사 부지에 포함되자 충북대박물관 조사단이 발굴에 착수했다. 겉흙의 일부를 제거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목책을 세웠던 큼지막한 기둥 구멍이 확인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 위를 감싸 도는 두 겹의 목책이 전모를 드러냈다. 성 안에서는 온돌 갖춘 집터, 저장 구덩이, 식수 저장용 목곽고와 함께 고구려 토기·철기가 무더기로 쏟아졌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퇴적토 속에서 발견된 고구려 금 귀걸이였다. 많이 파손된 것이었으나 평양 일대와 청원 상봉리에서 출토된 고구려 귀걸이와 유사한 것이었다.

월평동산성에서 고구려 흔적이 일부 드러났지만 백제 요소와 뒤섞여 있어 실체가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성골산성에서는 고구려군이 만든 성책, 그들이 살았던 집 자리, 그들의 무기와 생활용품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학계에선 이 산성을 ‘백제 웅진성을 겨눈 고구려군의 최전선 전초기지’로 추정한다.

○ 고구려가 충주에 주목한 까닭
남성골산성에서 출토된 금 귀걸이(왼족)와 청주(구 청원) 상봉리에서 출토된 금 귀걸이(오른쪽). 굵은 고리와 속 빈 구슬 등이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이다. 둘 모두 금강 일원에 행차 혹은 거주한 고구려 귀족 소유물로 보인다. 국립청주박물관 제공
남성골산성에서 출토된 금 귀걸이(왼족)와 청주(구 청원) 상봉리에서 출토된 금 귀걸이(오른쪽). 굵은 고리와 속 빈 구슬 등이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이다. 둘 모두 금강 일원에 행차 혹은 거주한 고구려 귀족 소유물로 보인다. 국립청주박물관 제공
1979년 4월 충주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된 고구려비는 5세기 어느 시점에 고구려가 충주로 진출했음을 잘 보여준다. 비문 마멸이 심하여 비석 내용이나 세운 연대 등에 대해 논란이 있다. 처음 비석이 발견되었을 때 백제의 한성 함락 이후 세워진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그 이후 5세기 전반에 세워진 것으로 연대를 올려 보려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근래에는 5세기 후반의 비석에 5세기 전반의 사건 일부가 수록됐다고 보는 견해도 나왔다.

2007년 충주 두정리에서는 고구려 석실묘 6기, 2010년에는 탑평리 유적에서 고구려 온돌시설이 발굴됐다. 이 온돌은 5세기 전반 백제 집 자리가 폐기된 후 일정한 시차를 두고 만든 것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 온돌의 연대는 충주 고구려비의 건립 시점과 비슷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고구려는 왜 충주를 장악하고 비석을 세웠으며, 또 고구려 사람들은 왜 그곳에 살다가 묻힌 걸까. 학자들은 그 이유로 충주의 풍부한 철산을 든다. 그러한 주장의 근거가 2006년 이래 탄금대 남쪽 칠금동에서 확인됐다. 바로 철광석을 녹이던 용해로가 무더기로 발굴된 것이다. 아울러 충주 곳곳에서는 제철용 백탄을 굽던 가마터 수백 기가 발굴됐다. 이는 전국 각지에서 조사된 백탄 가마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다. 백제 한성기에는 이곳에서 만들어진 철기가 배에 실려 풍납토성까지 옮겨졌을 것이다. 충주는 양질의 철광석, 백탄을 만들 수 있는 풍부한 땔감, 남한강 수운이라는 3박자를 두루 갖춘 곳이었다.

고구려는 충주를 우선적으로 장악함으로써 백제의 경제적 토대를 해체시키려 한 것 같다. 다만 고구려가 충주의 철산을 어떤 방식으로 경영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 없다.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로 보면 475년 장수왕은 평양으로 귀환했지만 고구려군의 주력은 여전히 서울이나 충주 등 한강 이남 주요 거점에 주둔하였음을 알 수 있다. 6세기 중엽 백제와 신라가 합세해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까지 고구려가 현재의 서울, 경기, 충청의 상당 부분을 영유했고 백제의 경제적 기반까지 고스란히 손아귀에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기반이 있었기에 고구려는 백제 웅진성 턱밑까지 진출해 백제의 숨통을 조일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아직 이러한 설명의 구체적 근거는 여전히 부족한 편이다. 장차 새로운 발굴과 연구를 통해 5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다이내믹한 역사가 제대로 쓰일 수 있기를 바란다.

#백제#고구려#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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