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땅에 도달하기[임용한의 전쟁사]〈192〉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2월 21일 03시 00분


코멘트
한때 우리 사회에도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라는 구호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우리에겐 고향을 찾는 명절이 추석이지만, 서구 문화에선 크리스마스다. 그래서인지 서구 전쟁에서는 전황이 유리해지면 꼭 “올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이 끝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연합군 병사 사이에서도 이런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눈이 내리고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자 미군 전사에 충격을 안긴 벌지 전투가 시작됐다. 병사들은 집에 가는 대신 눈과 추위 속에서 동상, 죽음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보내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싸워야 했다.

6·25전쟁에서도 인천상륙작전 후 승승장구해 북진하자 크리스마스가 희망의 날이 됐고, 사령부도 축제를 위해 서둘렀다. 1950년 장진호 전투 참전자들은 따뜻한 곳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을 수는 있었다. 크리스마스 전 연합군은 흥남철수 작전을 통해 북한을 빠져나왔다. 정원 60명이던 민간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피란민 1만4000명을 태우고 거제도에 도착한 날이 12월 25일이었다. 주력 병력은 대부분 24일 이전 부산항에 도착했다. 엄청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긴 했지만, 영하 30도의 혹한과 눈 속에서 벌인 장진호 전투에서 병사들은 살인적인 고난을 겪었다. 주력이었던 미 해병1사단에서 전사자와 부상자를 빼고, 걸어서 흥남을 떠난 병사는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중공군은 4만∼10만 명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

희망에 대한 상반된 이론이 있다. 개개인의 성공담에서는 늘 이렇게 말한다. “희망은 절대 여러분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전사에서는 반대다. 최악의 상황 이면에는 늘 ‘근거 없는 낙관’이 자리 잡고 있다. 희망은 감정의 영역이고 낙관은 실천의 영역이다. 냉정하고 정확히, 이상과 현실을 혼동하지 않는 현명함을 지녀야 희망의 땅에 도달할 수 있다.

#임용한의 전쟁사#크리스마스#희망#장진호 전투#인천상륙작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