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사과 하나면 의사를 멀리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사과가 건강에 좋다는 뜻인데, 실제로 사과는 비타민C가 풍부하고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페놀을 함유하고 있으며 충치 예방 효과도 있다. 나는 중학교 때쯤 배운 이 문장을 기억하며 아침 식사로 사과를 먹는다.
어쩌면 말장난이지만 요즘 한국 정치를 보면 사과가 국민의 건강에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사진기자로 정치인을 비롯한 소위 유명인의 사과(謝過)를 취재할 때가 많다. 국회 소통관을 비롯한 사회 곳곳에서 사과가 빈번하지만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사과’들이 횡행한다. 다사다난했던 올 한 해 범람했던 키워드 중 ‘사과’로 내가 본 한국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맛없는 사과가 풍년’이었다.
올해 가장 맛없었던 사과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과’다. ‘사과 없이 사망한 전두환’과 비록 가족을 통한 사과였지만 ‘사과하고 떠난 노태우’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극명하게 갈렸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는 “전 씨가 끝내 진실을 밝히지 않고, 사과도 없이 떠났다. 성찰 없는 죽음은 그조차도 유죄”라고 했다. 여당은 조문을 하지 않았고 국가장은커녕 아직까지 장지도 결정되지 않아 그의 유해가 연희동 자택에 임시 안치될 정도였다. 세상은 그의 사과를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최근 가장 답답한 사과는 코로나19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다. 방역법을 위반한 국무총리와 부산시장 그리고 화천대유 사건을 수사 중이던 검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송구하다”고 했다. 정부 역시 백신 공급 문제부터 접종 예약 먹통 사태 그리고 45일 만에 끝난 위드 코로나와 관련해 ‘송구’라는 표현으로 마무리 지으려 한다. 현장을 지켜보는 사진기자로서는 솔직히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청년들의 인생이 걸린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초유의 오류가 발생했지만 ‘유감’이라는 표현으로 넘어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모습도 탐탁지 않다. 사과와 사죄의 문화가 발달한 일본의 경우 총리를 비롯해 사회 지도층들이 카메라 앞에 나타나 20여 초씩 고개를 숙이는 화면을 자주 볼 수 있다. 과거 독일 나치의 만행에 대해 폴란드 국민 앞에 무릎 꿇었던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의 모습은 국제 사회에서 독일이 용서받고 통일과 번영을 시작할 수 있는 초석이 됐다. 반면 한국에서는 아직 제대로 된 사과의 모습을 마주한 기억이 별로 없다. 겨우 달라진 문화가 있다면, 그나마 최근 공개 기자회견을 통해 사과를 하는 유명인들이 포디움(연단)에서 두 발짝 정도 옆으로 비켜 나와 5초 정도 고개를 숙이는 제스처를 하는 매뉴얼이 통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뇌리에 남는 사과 사진이 없는 것은 내 기억의 문제일까.
“정치인의 사과는 사퇴”라는 말을 남기고 국회의원직을 내놓은 윤희숙 전 의원의 사과가 그나마 사진기자로서는 올해 신선한 장면이었다. 윤 전 의원이 최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힘 ‘내일이 기대되는 대한민국 위원회’로 복귀한 것을 두고 여당은 비난하지만 무(無)사과 행보에 비해서는 훨씬 낫다는 생각이다.
70여 일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지금 여야 거대 정당은 상대방의 흠집을 찾는 데 혈안이다. 정책 대결보다는 상대의 잘못을 찾아내기만 하면 승리의 고지를 장악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해명이 필요한 이슈가 많이 발생하고 사과도 잦다. 유력 대선 후보 두 명의 고개 숙인 사과 사진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이끌겠다고 나오는 정치 리더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답답한 마음이 이런 사과 사진 몇 장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을까.
온라인에서 누리꾼이 올린 댓글 중 “올해는 사과가 풍년이다. 두 후보의 매점매석으로 인해 국민들이 먹을 사과가 없다. 조만간 사과 폭동이 날 것이다”라는 지적이 가슴에 와 닿는다. 국민의 마음은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드러날 것이다. 사과 이미지와 대통령 선거의 결과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지 지켜보고자 한다. 물론 나부터 실수에 대해 진정한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연말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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