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해야 살아남는다[오늘과 내일/이진영]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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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생존 비결은 강함이 아니라 친화력
남에겐 잔인해지는 다정의 한계 극복해야

이진영 논설위원
이진영 논설위원
동아일보가 각계 전문가들의 추천을 받아 선정한 ‘올해의 책’은 브라이언 헤어의 공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입니다. 진화인류학자가 쓴 이 책은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 아니라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Survival of the friendliest)고 주장합니다. 경쟁과 이기심이 아닌 협력과 연대의 관점에서 진화론을 재해석한 메시지는 어느 한 사람이 위험해지면 모두가 무사할 수 없는 감염병 시대여서 울림이 큽니다.

진화론은 오랫동안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이론으로 오독됐지만 찰스 다윈도 “자상한 구성원들이 가장 많은 공동체가 가장 많은 후손을 남겼다”고 썼습니다(‘인간의 유래와 성선택’). 인간은 내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만 관심 있는 이기적인 동물이어서가 아니라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감성지수(EQ) 높은 존재여서 번성했다는 것이죠.

다른 동식물 사례는 생략하고 인류만 비교해 보겠습니다. 개인의 역량으로 치면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이 호모사피엔스보다 한 수 위였습니다. 힘도 세고 뇌도 15%나 더 큽니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이 10∼15명의 무리만 짓는 동안 호모사피엔스는 그 이상의 규모로 연대할 줄 알았습니다. 네덜란드 사상가 륏허르 브레흐만의 표현을 빌리면 네안데르탈인은 초고속 컴퓨터이고 인간은 구식 PC지만 와이파이를 이용할 줄 아는 종입니다. 인간이 협력적 의사소통으로 살아남은 진화의 흔적은 신체에 남아 있습니다. 인간은 얼굴 붉힐 줄 아는 유일종입니다. 타인의 생각에 반응한다는 뜻이죠. 흰 눈자위를 지닌 유일한 영장류이기도 합니다. 눈빛만 보고도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다정한 만큼 우리를 위협하는 ‘그들’에겐 잔인해질 수 있습니다. ‘다정한…’은 엄마 곰이 아기 곰과 함께 있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예로 설명합니다. 누구라도 아기 곰을 해치려 들면 엄마 곰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남극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자행된 대량 학살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는 종교적 유혈 분쟁이, 증오의 언어를 주고받는 사생결단식 정치 문화가 다정함의 딜레마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잔인한 표변을 비인간화로 정당화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털북숭이 짐승이거나 뿔 달린 악마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에겐 잔혹해지는 다정함의 한계도 ‘인간화’로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인 수천 명이 목숨 걸고 유대인을 구해주었습니다. 대단한 영웅심도, 종교적 신념 때문도 아닙니다. 전쟁 전 유대인 이웃이나 직장 동료와 친하게 지낸 경험이 있었을 뿐입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조지 오웰은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잡고 도망치는 적을 보고 이렇게 썼습니다. ‘파시스트가 아니라 분명 나와 같이 생긴 인간… 그에게 총 쏘고 싶지 않았다.’

새해에도 코로나 사태는 당분간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단체 줄넘기를 해야 합니다. 누구 하나라도 넘어지거나 뛰지 않으면 모두가 넘어지는 게임입니다. 다행히 우리에겐 지구상에 존재했던 99.9%의 종이 멸종하는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장의 무기가 있습니다. 다정함입니다. 참호전이 한창이던 1차대전 때도 영국군과 독일군은 참호 밖을 나와 함께 캐럴을 부르고 담뱃불을 교환하는 성탄절의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차별과 혐오의 참호에서 빠져나와 서로 눈 맞춤하며 고통을 나누고 희망을 만들어가는 다정한 새해가 됐으면 합니다.

#다정#인류 생존 비결#친화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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