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리 콘서트가 적은 한 해였다. 올해 관람한 몇 안 되는 온·오프라인 콘서트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작품이 있다. 월드 클래스 아이돌의 대규모 공연도, 젊은 래퍼의 신기한 메타버스 콘서트도 아니다.
이달 초 서울 마포구의 소극장에서 열린 유러피안 재즈 페스티벌 피날레 공연. 원격 연주 콘서트였다. 무대 왼쪽에는 대형 스크린, 중앙에는 연주자용 의자조차 앞에 놓이지 않은 빈 피아노가 덩그러니 놓였다. 지구 거의 반대편인 파리와 서울의 공간에 각각 놓인 두 대의 피아노는 특수 전기 장치와 초고속 인터넷으로 동기화된 상태. 프랑스에서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누르고 페달을 밟으면 유령의 집처럼 서울의 피아노에서도 똑같이 건반과 페달이 눌렸다. 괴기 심령 공상과학 영화를 연상케 하는 100분간의 콘서트가 끝나자 관객들은 약속한 듯 텅 빈 피아노 앞으로 몰려와 낮은 탄성을 지르며 연거푸 휴대전화 사진기 기능을 켰다.
#1. 미국 드라마 시리즈 중에 ‘웨스트월드’란 작품이 있다. 극중 웨스트월드는 미래의 놀이공원. 성인을 위한 잔혹한 테마파크다. 여기서 유료 입장객들은 성폭행하고 살해해도 된다. 인공지능을 말이다. 사람과 똑같지만 실은 완벽히 제어되는 인조인간들을…. 운영업체는 인조인간을 잠으로 리셋하고 꿈에서 정비하며 통제한다.
거의 매회 등장하는 웨스트월드 속 바의 자동연주 피아노는, 따라서 극의 주제를 함축한다. 피아노는 미리 입력한 차트에 따라 저 혼자 건반이 눌리며 ‘Black Hole Sun’(사운드가든) ‘No Surprises’ ‘Fake Plastic Trees’ ‘Exit Music (For a Film)’(이상 라디오헤드) 같은 침울하고 의미심장한 곡을 재생한다. 인간미 없이 뒤뚱대며 울리는 먹먹한 그 음악은 뒤틀린 디스토피아를 청각으로 형상화한다.
#2. 그에 비하면 저 유러피안 재즈 페스티벌의 원격 공연은 인간적이며 따뜻했다. 파리에서 연주자로 나선 레미 파노시앙과 조반니 미라바시는 한두 곡이 끝날 때마다 카메라 너머의 한국 관객을 향해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본인들도 이 상황이 마냥 신기한지 ‘거기서 잘 연주가 되고 있냐’고 묻거나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기도 했다.
관객들은 한마디로 계를 탔다.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공연장에서 피아노와 연주자의 옆선만 감상해 왔다. 잘 촬영된 연주회 영상을 봐도 건반이나 페달의 움직임은 연주자의 손과 몸에 가려 세세히 안 보였다. 그래서 애먼 연주자의 표정이나 외모, 의상에 한눈판 적도 있다.
그러나 이 콘서트에서 연주는 비로소 그 민낯과 본질 그 자체를 낱낱이 드러냈다. 피아노는 가로가 아닌 세로로 놓였다. 건반이 객석을 향한 것. 연주자의 손도, 등짝도, 다리도 없으니 페달과 건반이 눌리는 순서, 빠르기, 강도만이 적나라하고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내가 피아니스트 지망생이라면 이런 초교육적 콘서트를 웃돈 주고라도 보러 오리라.
#3. 파노시앙이 롤링스톤스의 ‘Paint It Black’을 빠른 피아노 독주로 변주할 때는 압권이었다. 원곡이 1980, 90년대 미국 전쟁 드라마 ‘머나먼 정글’에 등장한 기억 때문일까. ‘머나먼 손’은 쏟아지는 포화를 피해 전장을 뛰어다니는 보병대처럼 건반에 유령 같은 족적을 남기며 쾌주했다.
#4. 올해 접한 가장 충격적인 뉴스를 소개할 차례다. ‘KGC인삼공사는 건강기능식품 브랜드 정관장의 ‘화애락 이너제틱’ 전속 모델로 로지를 발탁했다고 22일 밝혔다.’ 로지는 실체가 없는 가상인간이다. 그러나 인스타그램 팔로어가 약 10만9000명. 버추얼 인플루언서다. 말 그대로 뭇 인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홍삼은 물론이고 밥도 한술 떠 먹을 필요 없는 로지가 건강미를 과시한다. 홍삼을 좀 먹어보라고 인간들에게 권한다. 인공지능의 시대, 메타버스의 세계가 도래한다. 이제 원격 콘서트의 신기한 복제와 재생을 초월해 선도나 창조의 영역에서 미래의 기술, 내일의 로봇이 손짓함을 문득 느낀다. #5.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
1968년 미국 SF 작가 필립 딕이 소설 제목을 통해 던진 질문이 새삼 화살처럼 날아온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안이 된 작품. 개정판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주인공 K(라이언 고슬링)는 ‘6, 10, 21’이라는 특별한 숫자를 마주한다. 2021년 6월 10일을 뜻한다. 바야흐로 현재는 과거의 미래다. 과거에서 온 타임캡슐을 집어 든다. 다시 저 멀리 미래로 던진다. 겉면에는 이렇게 써볼 참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