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결과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적 기관은 여론조사 업체들이다. 앞서고 있는 후보를 지지하는 ‘밴드왜건(Bandwagon)’이나 뒤지는 후보를 지지하는 ‘언더도그(underdog)’ 효과 같은 실체가 불분명한 현상들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국 정치에서는 상대 진영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후보자의 정책은 물론 도덕성도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경쟁 후보에 대한 ‘적대적 투표(negative voting)’가 지배적 논리가 된다. 따라서 상대방 후보와 경쟁하여 당선될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가장 중요한 투표의 지표다.
승산이 있다고 인식되는 후보는 ‘탄력’을 받아 추가적인 지지율 상승을 기대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후보는 사표 방지 심리로 지지율이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많은 잠재적 지지자들이 투표장에 나오지도 않는 악순환의 고리가 작동하게 된다. 미국 정치학자 래리 바텔스 교수가 주장한 ‘경선(競選) 역학(dynamics)’의 원리다.
필자는 2017년 대선에서 당시 국내 최초로 후보 지지율 조사 전수를 취합해 소위 ‘하우스 효과(House Effect)’라 불리는 개별 조사기관의 고유한 경향성을 보정한 지지율을 추정하여 매주 발표한 바 있다. 지금 돌이켜 살펴보면 당시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여러 후보의 지지율이 급격하게 출렁인 것을 볼 수 있다.
우선 탄핵 정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초반 문재인 후보의 지지율은 범보수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에게 최대 10%포인트가량 뒤진 적도 있다. 그러나 막상 반 전 총장이 국내 행보를 시작하자 지지율이 급락했고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때부터 지지율의 역학이 작동한다. 반 전 총장 불출마 선언 직전부터 민주당 경선에 참여 중이던 안희정 후보의 지지율이 급상승하며, 안철수 후보를 넘어 2위로 올랐다. 반 전 총장의 당선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인식되자 문 후보에 대한 대안을 찾던 많은 유권자들이 진영 경계를 넘어 안희정 후보를 지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3월 말 민주당 경선 막바지에 안희정 후보의 탈락이 확실시되자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이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문 후보에 대한 또 다른 대안을 찾던 유권자들의 기대가 3위였던 안철수 후보에게 옮겨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불과 2주가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이 10% 중반에서 40% 근처까지 수직 상승했다. 여론조사의 가히 가공할 만한 영향력이다.
문제는 이 시점에서 아주 다른 여론조사 결과가 쏟아져 나왔다는 점이다. 대선(5월 9일)을 약 3주 남긴 4월 중순경 안철수 후보 지지율이 거의 최고점에 달했다. 4월 10∼14일 사이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에 등록된 9개의 조사를 살펴보면 A업체는 안철수 후보가 문 후보를 0.3%포인트 앞선 것으로 발표한 반면 B업체는 문 후보가 14.7%포인트 차로 앞섰다고 발표했다. 나머지 업체들도 문 후보의 리드가 0.7%부터 9.5%포인트까지 천차만별이었다. 결과론적으로 B업체의 예측이 맞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조사 결과가 안철수 후보 당선 가능성의 인식에 미쳤을 영향을 고려하면 과연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일까.
선거를 2주 정도 앞둔 시점의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후보 지지율이 급하락할 무렵에야 홍준표 당시 새누리당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지지율이 10%에도 미치지 못했던 홍 후보는 결국 24.0%를 득표해 안철수 후보를 앞섰다.
이번 대선에서도 지난 대선 못지않게 조사기관별 격차가 크다. 여론조사는 여론의 지표여야지 여론을 주도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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