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차를 만드는 국내 자동차 대기업들의 중고차 시장 진출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국내 완성차 5개사(현대 기아 르노삼성 한국GM 쌍용) 이익을 대변하는 한국자동차산업협회는 1월부터 중고차 사업 진출 작업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주무부서인 중소벤처기업부는 수년째 끌어온 중고차 판매업에 대한 ‘생계형 적합업종’ 심의위원회를 다음 주 개최할 예정이다.
국내 중고차 시장은 2013년부터 대기업의 진출이 막힌 중소기업의 ‘성역’이었다. 중고차 매매업의 ‘중소기업 적합업종’ 기한(6년)은 2019년 2월에 끝났지만 중고차 업계가 생계형 적합업종 지정을 신청하면서 3년 가까이 시장 개방을 둘러싼 논쟁이 되풀이됐다. 완성차 업체들은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 정보 비대칭으로 ‘레몬마켓(저급품만 유통되는 시장)’이라 불리는 중고차 시장에 대기업 진출이 활성화되면 서비스가 선진화되고 소비자 편익도 개선될 거라고 주장한다. 반면 기존 중고차 업계는 대기업의 독과점으로 가격이 올라 오히려 소비자가 불이익을 받을 거라고 반발하고 있다.》
○ 소비자 불신 쌓인 ‘30조 레몬마켓’…3년간 공회전
지난해 12월 찾은 서울 서초구의 한 페라리 대리점에는 표면에 흠집 하나 없는 신차급 중고차 매물이 전시돼 있었다. 페라리의 숙련된 기술자들이 190여 개 항목을 검증한 ‘인증 중고차’다. 신차 모델도 매장용 태블릿PC를 통해 인증 중고차 매물과 바로 비교할 수 있다. 페라리의 공식 수입 판매사인 FMK는 “14년 이내 등록된 중고 차량을 대상으로 품질과 성능, 소유주 이력까지 투명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차와 중고차를 함께 취급하는 매장은 국내 완성차 브랜드에서는 찾기 어렵다. 고객이 쓰던 차를 대리점에 직접 팔아 차액을 보태 새 차를 사는 ‘트레이드 인(중고 보상)’ 방식 등 완성차의 중고차 사업 자체가 원천 봉쇄됐기 때문이다.
중고차 시장은 신차와 달리 적정한 가치를 산출할 수 있는 체계가 불투명하다. 판매자는 차량의 사고·교환 이력 등을 꿰고 있지만 구매자는 허위·미끼 매물, 주행거리 조작 등에 대해 속수무책이다. 시민단체 ‘소비자주권시민회의’가 지난해 4월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9.9%가 ‘중고차 시장은 혼탁하고 낙후돼 개선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중고차 시장 개방 논의는 중소기업 보호라는 명분 아래 공전을 거듭했다. 소상공인 생계형 적합업종 특별법에 따르면 중기부는 2019년 2월 중고차 업계의 신청이 있은 뒤 법정 시한(최대 15개월)인 2020년 5월 심의위를 열었어야 했지만 “이해관계가 첨예하다”며 정공법 대신 상생안 마련에 나섰다. 완성차와 중고차 업계 양측은 완성차 업체의 중고차 매집 및 판매를 허용하는 데는 합의했지만 거래 물량 등에서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다. 또 중고차 업계가 막판에 신차 판매권을 요구하면서 협상이 결렬됐다.
○ “중고차 시장 투명화” vs “대기업이 인기 물량 독점”
완성차 업계는 대기업 참여로 중고차 시장을 선진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엄격한 품질 관리와 정찰제, 공신력 있는 정보 제공 등으로 소비자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것이다. 국토교통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중고차 이전등록 대수(당사자 매매 포함)는 361만 대로, 신차등록 대수인 160만 대보다 2배 이상으로 많다. 연간 중고차 거래액은 25조∼30조 원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차량용 반도체 부족으로 인한 신차 출고가 지연되면서 중고차 시장은 더욱 커지고 있다.
완성차 업계 입장에서는 제조사가 중고차 관리에 나설 경우 시세와 브랜드 경쟁력을 동시에 향상시킬 수 있다. 순정품 사용 등으로 품질을 높인 중고차가 믿을 만한 가격에 거래되면 중고차 시세가 높아져 신차 판매에도 도움이 된다. 또 신차 생산·판매를 넘어 차량 정비와 중고차 거래, 폐차에 이르는 자동차의 생애 전 주기를 관리함으로써 신사업 기회도 찾을 수 있다.
완성차 업계는 대기업 참여로 중고차 시장 생태계도 더 커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반도체 수급난과 전기차 전환 가속화로 위기에 직면한 부품업계는 완성차 업체들의 인증 중고차 사업이 차량 검사와 부품 교체 시장 수요를 늘려 새로운 활로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 관계자는 “국내 중고차 시장(업자 매매)은 신차 시장 대비 1.3배 수준으로 중고차 시장이 개방된 미국(2.4배)과 독일(2.0배) 등에 비하면 여전히 규모가 작다”고 말했다.
반면 중고차 업계는 대기업과 경쟁하면 소상공인 위주인 기존 매매상 상당수가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중고차 매매업체 6351곳 가운데 종사자가 10명 미만인 업체가 5598곳(88.1%)에 달한다. 연간 매출액이 10억 원 미만인 곳은 5321곳(83.8%)이다. 업계 종사자는 3만6000여 명으로 정비 광택 탁송 등 중고차 매매와 관련한 연관 산업과 그 가족까지 감안하면 대기업 진출로 최대 30만 명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게 중고차 업계 주장이다.
완성차 업체는 물량을 독점하지 않기 위해 출시 5년 이내 주행거리 10만 km 이하의 중고차만 판매할 계획이지만 이는 인기가 높은 차량의 독식으로 이어져 영세업체들은 중고차 매입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 등록된 자동차의 70%를 차지하는 현대차그룹의 경우 중고차 매입 시장에서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게 된다.
중고차 가격이 상승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자체 공식 정비 과정을 거치는 완성차 업체들의 중고차 재상품화 비용이 개인 정비업자 손을 거치는 기존 매매상보다 비싸기 때문이다. 이미 인증 중고차 사업을 하고 있는 수입차 업체도 퀄리티 좋은 물량을 흡수하면서 가격은 다소 높게 책정하고 있다.
○ 시장 규제 없는 선진국은 ‘피치 마켓’ 전환 가속
완성차 업계는 품질 관리로 인한 가격 인상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역시 소비자 선택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완성차 업체와 중고차 업체가 연식, 주행거리, 서비스 기준 등에 따라 중고차 시장을 세분해 소비자의 다양한 니즈를 충족하고 있다. 일본은 도요타, 닛산 등 제조사가 경매, 인증 등 중고차 유통시장을 주도하지만 빅모터, 걸리버 등 경쟁력을 갖춘 기업형 중고차 업체들이 공존하고 있다. 이들 나라 모두 기업 규모를 기준으로 한 규제가 없다.
이미 인증 중고차 사업을 하고 있는 수입차 업계와의 역차별도 문제다. 독일 BMW, 메르세데스벤츠 등 수입차 업체들은 중고차 거래를 통해 지속적으로 고객 관리를 하면서 신차 판매로 연결시켜 점유율을 올리고 있다. 전기차 강자 테슬라도 최근 중고차를 직접 팔기로 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수입차의 국내 신차 시장 점유율은 판매대수 기준 18%, 금액 기준 32%다. 중고차 시장 점유율도 매년 1%씩 증가해 지난해 14% 수준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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