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용]순직소방관 기억할 ‘길’이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월 12일 03시 00분


미국선 도로 등에 이름 붙여 기억
연평균 4.9명 순직, 한국선 1곳뿐

박용 부국장
박용 부국장
6일 경기 평택시 청북읍 냉동창고 신축공사 현장에서 불이 나 진화 작업에 투입된 소방관 3명이 숨졌다. “건물 안에 작업자 3명이 남아 있다”는 말을 듣고 투입된 이형석 소방경(51), 박수동 소방장(32), 조우찬 소방교(26)는 현장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거침없이 화재 현장으로 뛰어 들어간 영웅들은 화마에 스러져 끝내 가족과 동료의 품에 돌아오지 못했다.

“화재 현장에 사람이 있다”는 한마디에 소방관들은 불구덩이로 몸을 던진다. 2001년 3월 서울 서대문구 홍제1동 다가구주택 화재 사건에서 순직한 6명의 소방관들도 그랬다. 당시 “1층에 사람이 남아 있다”는 주민들의 말을 듣고 뛰어 들어간 소방관들은 30년도 더 된 낡은 벽돌 건물이 무너져 내리면서 순직했다.

당시 취재 중 장례식장에서 만난 한 소방관은 순직한 동료가 남긴 작은 수첩의 한 페이지를 보여줬다. 거기엔 “친구가 보고 싶다”는 노랫말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날 밤 소방관들은 불과의 사투를 끝내고 가족, 친구들의 품으로 달려가고 싶었을 동료를 그리며 술잔을 기울이고 또 기울였다.

한국에선 순직한 영웅들을 만나려면 현충원이나 기념관에 가야 하지만 미국 아이들은 동네 길이나 건물 이름에 얽힌 유래를 조사하는 학교 숙제를 하며 그들의 영웅을 만나고 배운다. 문자가 없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산 강 바위 등 지형지물에 조상들의 무용담을 붙여 입에서 입으로 역사를 전했듯이 미국인들은 도로, 다리, 건물 등에 영웅의 이름을 남기고 공동체의 역사를 기억한다.

도로에 순직한 고속도로 순찰대원의 이름을 붙이거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군인의 이름을 딴 다리를 만드는 식이다. 동두천의 캠프 케이시나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 등 주한미군 기지들도 6·25전쟁이나 작전 중 순직한 미군들의 이름에서 따왔다. 미 뉴욕 유엔본부 근처엔 북한을 방문했다가 체포돼 혼수상태에서 미국으로 돌아와 숨진 미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이름을 딴 길도 있다. 뉴욕시가 북한이 저지른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유엔 주재 북한 대표부 앞길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미국식 기억법이다.

소방청에 따르면 한국에선 최근 10년간 연평균 4.9명의 소방관이 순직하고 567.2명이 공상을 당했다. 그런데도 전국에 순직 소방관의 이름을 딴 길은 경기 평택시가 지난해 12월 평택국제여객터미널 인근 도로 750m 구간을 ‘소방관이병곤길’이라고 지정한 게 처음이라고 한다. 전국에 K팝 스타, 영화배우, 트로트 가수 등의 이름을 딴 도로가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순직 소방관의 이름을 딴 명예도로가 여태 없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국회의원들은 예산 지출을 줄여서라도 국민들과 자영업자들을 위하여 수십조 원의 재난지원금 등을 지원해야 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얘기한다. 그렇지만 정작 세비 삭감 같은 공동체를 위한 작은 기여조차 실천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러면서 다른 이들에겐 무한 헌신과 희생을 요구한다.

경제는 노동, 자본, 원자재 등으로만 성장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재난과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뛰어들고 맨 마지막에 빠져나오는 제복 입은 영웅들이 없다면 공동체는 버티지 못한다. 이들의 희생을 존중하고 신뢰하는 문화와 같은 탄탄한 사회적 자본이 받쳐줘야 공동체도, 경제도 더 건강하게 성장한다. 이젠 우리만의 ‘영웅 기억법’이 필요하다.

#평택 냉동창고 화재#순직소방관#영웅 기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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