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에 가족을 만나기 위해 3년 만에 콜롬비아에 갔다. 길거리와 집들, 가게 곳곳에서 한 해를 보내는 내용의 가사를 담은 옛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택시를 탔을 땐 마치 커피 농장이나 사탕수수밭의 농부처럼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고향이 꽤나 그리웠던 것이다.
물론 2021년은 모두에게 힘든 해이긴 했지만 나는 나에게 남겨진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2021년은 나에게 ‘두부’를 남겼다. 두부는 아래층에 살고 있는 강아지 이름이다. 작은 개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두부의 태도는 자신의 체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당당하다. 진지하고 위협적인 문지기이자 골키퍼 같다.
“두부야! 두부야!” 몇 달 전에 이사 온 새로운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을 열 때마다 작은 목소리로 두부를 불러본다. 두부는 큰 귀를 가진 하얀 개다.
두부의 주인은 수다스럽지만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집주인이다. 독특한 억양을 갖고 있는데, 이북 출신이 아닐까도 생각해 봤다. 그럴 리가 없긴 하다. 6·25전쟁 때 남한으로 피란 온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우리 동네에도 이제 피란민은 거의 남지 않았다. 이 동네에는 한때 옷 공방이 많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집에서 나가 코너를 돌면 그 공방 중 하나가 살아남아 매일 실타래를 돌린다. 저녁 늦게까지, 심지어 일요일 밤에도 훤하게 불을 켜 놓고 작업을 한다. 우리 집 김치를 책임지는 ‘딜러’ 아주머니가 있는 재래시장에 장 보러 나갈 때마다 나는 그 공방의 불빛을 지나친다.
2013년 아내와 한국으로 이사했을 때, 여행 가방 두 개에 불과했던 우리의 짐은 2021년 여름에 지금의 집으로 이사하던 날 5t 트럭 한 대로도 모자랄 만큼 늘었다. 동시에 이제야 한국에서 내 물건으로 가득한 내 집을 꾸리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집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훌륭한 컬렉션의 LP 음반 200여 장과 200여 권의 사진집(이갑철, 알렉 소스, 후카세 마사히사 등), 작업 방의 한 벽이 가득 차도록 설치한 책장에 꽂힌 책들이 있다. 이전까지는 여기저기에 쌓여 내 집에서 방랑하던 책들이 드디어 안착한 그 책장을, 2021년이 나에게 남긴 것이다.
거실에 있는 몇 개의 가구는 이태원의 길에서 주운 것들이지만, 독특한 디자인과 더불어 상태가 매우 좋은 것들이다. 문을 닫은 가게 앞에 있던 하얀색 거실용 테이블과 코너장으로,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에 등장하는 ‘코로바 밀크바(Korova Milkbar)’에 있었을 법한 스타일이다.
그 옆에는 바우하우스의 건축을 떠오르게 하는 붉은색 옷걸이가 있다. 이건 이 집에 이사 오기 전 강남의 한 디자인 가구 가게에서 샀다. 이뿐만 아니라 2층에 있는 우리 집의 발코니에는 레몬 나무와 타마린드 나무도 있다. 매일 아침 발코니에서 식사를 하고 저녁엔 맥주를 한 잔씩 마시는 곳으로 앞에는 용산 미군기지 안의 푸른 나무들 풍경이 펼쳐져 있다. 미군기지에 남아있던 부대들은 다른 곳으로 다 옮겨 갔고 지금은 은행나무와 텅 빈 건물들만이 보인다. 우리가 사는 동안 부지는 공원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한다. 한편 레몬 나무 옆에는 아가베와 몬스테라가 있다. 아담의 갈비뼈. 어떤 곳에서는 몬스테라를 그렇게 부른다.
두부, 가구, 책, 음반, 실내와 실외의 식물들까지 이 모든 것이 나를 서울에서 쉽게 떠나지 못하게 한다. 2021년이 나에게 새로 남긴 게 또 있다. 앞집에는 콧수염을 기르고 몸집이 큰 중년의 캐나다인이 살고 있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5분마다 집 앞에 나와 담배를 피우고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주식이나 가상화폐의 등락을 살펴보는 게 분명하다.
서울에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면, 곧 이어 내 이웃을 생각한다. 한 손엔 담배를, 한 손엔 휴대전화를 쥔 그가 문 앞에서 넘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누가 앰뷸런스를 불러 줄까? 역시, 나는 떠날 수 없다. 2022년에도 나의 서울 생활은 계속되리라.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