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후보들이 경쟁 후보의 공약을 그대로 베끼는 행태가 도를 넘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지난해 말 병사 월급을 200만 원으로 올리는 국방공약을 발표하자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이달 ‘병사월급 200만 원’이라는 한 줄 공약을 내놨다. 병사 월급 인상은 부사관이나 장교, 다른 공무원의 임금체계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막대한 재정이 드는 복잡한 이슈지만 이에 대한 충분한 검토를 했는지 의문이다.
반대로 윤 후보가 지난해 8월 민간 재건축 용적률을 500%로 높이는 ‘역세권 첫집’ 공약을 제안한 지 5개월 만에 이 후보는 용적률 500%의 4종 주거지역 신설안을 밝혔다. 두 후보의 부동산 공약은 발표 시기만 다를 뿐 250만 가구 공급, 보유세 인하,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유예 등 정책 기조에서 차이가 없다. 제목, 핵심 아이디어, 전체 내용 등 다양한 각도에서 베끼기가 이뤄지다 보니 공약만 놓고 보면 누구의 것인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최근 밝힌 경인선 및 경인고속도로 지하화 공약도 이 후보나 윤 후보의 지역 공약과 겹친다.
후보들이 남의 공약을 무차별적으로 베끼는 것은 정치 철학이나 소신 없이 지지율에만 목을 매기 때문이다. 특정 지역이나 계층이 관심 있어 하는 정책을 공약으로 끌어들이다 보니 신규 공약이 자신의 기존 정책과 상충하는 자가당착도 나타나고 있다. 이 후보는 증세 방안인 토지이익배당금제(국토보유세)를 주장하다가, 갑자기 종합부동산세 등 부동산 세금 감면을 들고 나왔다. 이 후보의 공약을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던 윤 후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영업자 50조 원 지원, 수능 응시료 세액공제 등 퍼주기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공약 베끼기가 남발되면 정책 우선순위가 뒤틀려 심각한 자원 낭비를 부르게 된다. 한편으로는 실행해선 안 되는 정책을 공약이라는 이유로 무리하게 추진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반면에 꼭 해야 할 정책이 너무 많은 공약에 치여 뒤로 밀리게 될 가능성도 있다. 공약을 믿었던 유권자들은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단계까지 가기에 앞서 베끼기 공약의 홍수를 보면서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품는 유권자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대선은 유례없는 비호감 대선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공약 베끼기까지 가세해서 정치 불신을 키워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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