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우면서도 따뜻하고, 따뜻하면서도 고통스러운 화가의 눈이 느껴지는 그림이 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슬픔’이 그러하다. 단색으로 된 데생이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그림 속의 여자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무슨 고민이 있는지 무릎에 팔을 괴고 얼굴을 묻고 있다. 아랫배가 많이 나온 것으로 보아 머지않아 아이를 낳을 임신부 같다. 오른쪽 하단에 붙은 ‘슬픔’이라는 제목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슬픔에 잠겨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여자는 왜 그렇게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자초지종을 알려면 고흐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고흐는 스물아홉 살 때인 1882년 헤이그에서 그녀를 만났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2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녀는 그보다 세 살 위인 가난한 매춘부였다. 다섯 살짜리 딸이 있었고 누군가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누구라도 도와주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상태였다. 고흐는 거리를 떠돌던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녀와 아이에게 지낼 곳을 주었고 그녀는 화가가 되려는 그를 위해 모델을 서줬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그림이 ‘슬픔’이었다.
화가는 그녀의 모습을 화폭에 담으면서 마음이 아팠다. 그는 그녀를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았다. 매춘을 하고 유산을 하고 아이를 낳고 또 다른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것은 결국 가난 때문이었다. 그랬다. 가난이 문제였다. 그는 눈앞에 있는 그녀의 몸에서 가난에 삶을 저당 잡힌 여성들의 슬픈 현실을 보았다. 그가 본 것은 몸의 외관을 넘어선 삶의 본질이요, 실존이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닿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는 천재이기 전에 그렇게 따뜻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위험한 수술을 통해 아이를 낳은 그림 속의 여자를 잠시나마 돌본 것도 그였다. 이 그림에서 화가의 고통스러우면서도 따뜻한 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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