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신년사 대신 작년 말 닷새 동안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 결과를 설날 노동신문에 싣는 방식을 선택했다. 작년은 새해 벽두부터 노동당 8차 대회를 열어 신년사를 하지 않았고, 재작년은 올해처럼 설 직전에 노동당 전원회의를 열어 신년사를 대신했다. 김정은은 왜 집권 이후 매년 하던 육성 신년사를 포기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크게 3가지 이유로 차마 신년사를 할 수 없을 듯하다.
첫째는 창피함이다. 도저히 말할 체면이 없다. 신년사는 회의 결정을 신문에 싣는 것보다 훨씬 더 무게감을 가진다. 김정은이 직접 얼굴을 드러내고 북한 주민에게 약속하는 일인데,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 직접적인 비난의 화살이 돌아온다. 신년사를 계속 하다간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는 비난이 점점 커질 수 있다.
북한의 신년사는 수십 년 동안 늘 “지난해는 위대한 승리의 한 해였다”로 시작됐다. 과거엔 억지로라도 성과라는 것을 나열했지만 최근 3년 동안은 도무지 자랑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성과가 없는데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화자찬하면 시작부터 거짓말쟁이가 된다.
지난해만 봐도 김정은은 세 가지 대공사에 북한의 역량을 총동원했다. 평양에 5년 동안 5만 채를 건설하며 첫해에 1만 채를 완공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1일자 노동신문은 “1만 채 건설이 기본적으로 결속됐다”고 전했다. 첫해부터 완공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라톤을 한다고 큰소리를 쳐놓고 5분의 1도 가지 못하고 주저앉은 셈이다.
김정은이 1만 채 건설보다 더 관심을 기울여 여러 차례 현장에 나가 독촉했던 보통강 다락식 주택구 건설은 “기본적으로 결속됐다”는 표현도 아닌 “새로운 건축 형식이 도입됐다”고 밝히고 있다. 검덕지구 5000채 살림집 건설도 성과적으로 진척됐다고만 밝혔다. 일부는 완공했지만 약속했던 숫자에 턱없이 미치지 못한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작년 벌인 공사를 마저 마무리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또 공사를 벌여놓겠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올해는 차마 공사판을 언급하진 못하고 전원회의 결정을 내세워 농사혁명, 밀 재배 등을 운운하며 관심사를 농촌으로 돌리려는 듯하다. 그 결과 북한 사람들은 작년엔 공사판에서, 올해는 논밭에서 삽질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작년만 그런 게 아니다. 그 직전 2년 연속 김정은이 역점 사업으로 내밀던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와 평양종합병원이 모두 완공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년사를 통해 뭘 약속한다는 것은 거짓말 보따리만 더 키우는 셈이 된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 않으니 당 대회나 전원회의 형식을 빌려 과제만 나열하는 식으로 넘어가는 듯하다.
신년사를 못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코로나 ‘셀프 봉쇄’ 24개월 만인 16일 북한 열차가 단둥에 나왔다고는 하지만, 열차가 다닌다고 북한 경제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 이미 북한의 대외무역은 80% 이상 줄었다. 2017년부터 사상 최강의 유엔 대북 제재가 잇따라 채택되면서 북한의 3대 수출 상품인 광물, 수산물, 임가공 수출이 중단됐고 2019년 12월까지 해외 노동자들도 대다수 귀국했다. 북한의 돈줄이 꽉 막힌 것이다. 그러니 코로나 봉쇄가 풀려도 북한이 벌 수 있는 외화는 10년 전에 비해 많이 쳐줘도 20% 수준에 그친다. 이는 코로나가 사라져도 김정은에겐 희망이 없다는 의미다.
신년사를 못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여러 정황을 통해 볼 때 건강상 문제일 수도 있다. 특히 지난해 김정은은 살이 급격하게 빠지는 등 외형상 큰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양강도 삼지연 건설장에 나타난 것을 빼면 평양 시내만 서너 차례 시찰했을 뿐 지방에 나가지 않았다. 과거와 비교해 눈에 띄게 게을러진 것이다. 지난해 12월 김정일 10주기 기념식에 나타났을 땐 급격한 노화 흔적도 보였다.
물론 김정은이 신년사를 읽지 못할 상황은 아니겠지만 읽는 순간 목소리, 숨소리, 혈색 등의 분석이 가능하다. 과거와 차이가 크다면 북한 주민부터 “예전보다 훨씬 숨이 가빠 하는데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식으로 수군거릴 수 있다.
김정은에게 신년사를 하라고 독촉하고 싶진 않다. 현실은 점점 시궁창에 빠져드는데 고장 난 축음기처럼 매년 “위대한 승리의 해”라는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하는 것은 북한 주민도, 나도 듣기 괴로운 일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