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 중립성 민주주의 최소 성립조건
편향 논란 조해주 임기연장 막아선 직원들
선관위의 불편부당과 품격 지속돼야
필자는 2017년 12월 33개 공공기관에 대한 직무수행 평가 설문조사를 수행한 바 있다. 당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 초기였다. 이 조사에서 60%의 응답자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잘하고 있다”고 답하며 33개 기관 중 3번째로 높게 평가했다. 참고로 33개 기관 전체의 평균 긍정 평가 비율은 30.9%에 불과했다. 중앙선관위는 평균적인 국가기관에 비해 거의 두 배 가까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다.
이러한 긍정 평가의 배경에는 중앙선관위가 그간 쌓아온 불편부당(不偏不黨)의 명성이 있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수많은 선거가 있었고 국가정보원 댓글 조작 논란에서 드루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선거 관련 범죄가 있었지만 선관위 자체의 중립성에 관해서만큼은 크게 의심받은 적이 없었다.
어찌 보면 민주주의는 과거 서로간의 ‘살육(殺戮)’을 통해 쟁취하던 권력을 다수결 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한 일종의 합의다. 패자는 공정한 선거라는 믿음이 없다면 승복할 수 없다. 따라서 선관위의 중립성은 민주주의의 최소 성립 조건이다.
실제로 2017년 조사에서 국가정보원(10.9%·33위), 방송통신위원회(18.0%·32위), 감사원(26.4%·29위), 검찰청(29.9%·28위) 등 정권이 바뀔 때마다 코드 인사와 정치적 중립성 논란에 휘말려온 기관들은 최하위권의 평가를 받았다.
솔직히 최근 몇 년간 불편부당한 선관위의 명성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다. 급기야 2020년 4·15총선 당시 “일부 선거구에서 비정상적 투표용지가 다수 발견되었고 무효 처리됐다”는 부정선거 의혹마저 제기됐다. 해외 저명 학자가 10대 경제대국이라 자부하는 한국의 부정선거 의혹에 대한 논문까지 발표했다.
국내 학자들이 나서 반박 논문을 게재하긴 했으나 이런 의심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선관위의 추락한 위상을 보여준다. 2017년만 해도 직무수행 평가 최상위권이었던 선관위가 제3세계 국가 중에서도 민주주의 경험이 가장 미천한 국가들에서나 제기될 만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가 만료되는 조해주 중앙선관위 상임위원의 사의를 반려해 선관위원직을 유지하게 했다. 선관위 사무를 총괄하는 상임위원은 헌법상 최고 6년까지 임기 연장이 가능하지만 1999년 선관위법 시행규칙 개정 후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3년 임기 만료 뒤 선관위에서 물러났다. 더구나 조 상임위원은 2019년 1월 임명 당시부터 문 대통령 대선 캠프 특보 출신이라는 이력 등으로 편향성 시비가 제기돼 사상 처음으로 국회 인사청문회 없이 임명된 바 있다.
대선을 불과 한 달여 앞둔 선관위의 심각한 중립성 시비가 불거질 것이 뻔했다. 선관위 입장에서 보면 불편부당에 기반한 선관위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한순간에 검찰, 방통위, 감사원, 국정원 수준으로 떨어질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러자 선관위 공무원들은 스스로 행동에 나섰다. 20일 중앙선관위 실·국장단, 과장단, 사무관단 일동의 명의로 조 상임위원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전국 17개 광역지자체 선관위 지도부도 조 상임위원의 사퇴를 촉구하는 입장을 전했다고 한다.
선관위 공무원들도 모두 개인적인 정치적 신념과 선호가 있을 것이다. 엘리트 공무원인 만큼 승진과 출세에 대한 욕심은 왜 없겠는가. 그러나 조직을 지탱하는 기본 원칙인 불편부당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서로간의 입장차를 뒤로하고 한목소리를 냈다. 선관위의 중립성을 지키는 것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과격한 시위나 집단행동이 아니라 품격이 느껴지는 어조의 간곡한 ‘요청’ 형식이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줄을 서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구성원들 간 진흙탕 싸움마저 불사하는 일부 공공기관과 달랐다. 선관위의 품격을 보여줬다.
전날까지도 선관위원직 수행 의지를 내비쳤던 조 상임위원은 다시 사의를 표했고 문 대통령도 두 번째 사의는 수용했다. 여기에 조 상임위원의 전례 때문에 국민의힘에 입당해 경선 관리위원으로 활동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야당 몫의 선관위원으로 추천됐던 선관위 출신 문상부 후보자도 “후배들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자진사퇴했다.
민주주의는 수많은 크고 작은 위기의 순간을 넘기며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가 감히 “공무원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했는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