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LG에너지솔루션이 국내 자본시장을 뜨겁게 달궜다. 국내외 기관들이 수요예측에서 무려 1경 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주문을 써냈다. 개인투자자 442만 명이 참여한 공모주 청약에선 사상 최대인 114조 원의 증거금이 들어왔다. 청약 전부터 온라인 카페에선 “설 전 재난지원금을 받는 것이니 꼭 해야 한다”는 글이 이어졌다. 국내 1위, 세계 2위 전기차 배터리 업체 상장에 ‘개미’투자자들이 열광한 것이다.
돈 벌 기회를 찾아 개미들이 증시로 몰리지만 이들을 위협하는 지뢰는 도처에 있다. 증시를 뒤흔드는 인플레이션 공포, 긴축 움직임만은 아니다. 대주주에 유리한 ‘쪼개기 상장’, 경영진의 ‘주식 먹튀’ 등이 잇따르고 있어서다. LG에너지솔루션은 LG화학에서 배터리 사업을 떼어내 만든 기업이다. 알짜 사업이 빠져나가면서 LG화학 주가는 지난해 초 100만 원대에서 현재 67만 원대로 추락했고 LG화학에 투자한 개미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기존 회사의 유망 사업을 분할해 자회사를 설립한 뒤 동시 상장하는 이런 방식(물적분할)은 해외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모기업 대주주는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지만 소액주주들은 주가 하락의 피해를 고스란히 받기 때문이다. LG화학처럼 배터리 사업을 떼어낸 SK이노베이션과 물적분할을 예고한 CJ ENM, NHN 등도 소액주주의 공분을 사고 있다.
카카오 핵심 계열사인 카카오페이는 상장 한 달 만인 작년 12월 류영준 대표를 포함한 임원 8명이 스톡옵션으로 받은 주식을 대거 처분해 870억 원이 넘는 차익을 올렸다. 그것도 8명이 한꺼번에, 코스피200지수 편입 호재에 맞춰 시간외 거래로 주식을 팔았다. 투자자들은 작전 세력의 ‘먹튀’를 방불케 하는 경영진의 부도덕한 행위에 분노했다. 카카오페이 주가는 고점 대비 거의 반 토막 났고 계열사 주가도 하락했다. 경영진의 스톡옵션 행사가 위법은 아니지만 파장을 무시한 채 차익 챙기기에 급급해 소액주주에게 피해를 끼친 것이다.
또 지난주 코스닥 상장사 신라젠의 상장 폐지가 결정됐다. 다음 달 최종 확정이 남아 있지만 소액주주 17만여 명은 2년째 주식 거래가 중단돼 고통받고 있다. 신라젠은 상장 전 발생한 경영진의 횡령·배임으로 주식 거래가 정지됐는데, 투자자들은 상장 과정에서 이를 걸러내지 못한 것에 항의하고 있다. 오스템임플란트도 회삿돈 2215억 원을 빼돌린 횡령 사건으로 신라젠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오스템 사태는 기업의 엉터리 내부통제 시스템과 회계법인의 허술한 감사, 금융당국의 뒷북 감시가 맞물린 결과다.
한국 기업의 주가가 비슷한 외국 상장사에 비해 저평가받는 것을 ‘코리아 디스카운트’라고 한다. 그동안 북핵 문제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와 대기업 지배구조 문제가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여기에 최근 자본시장의 후진성과 경영진의 모럴 해저드가 더해지는 분위기다. 투자는 개인의 판단과 책임하에 하는 것이지만, 그 바탕엔 투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시장질서가 확립돼야 한다. 기울어진 운동장과 시장의 불투명성으로 개미투자자만 억울한 피해를 당하는 일이 계속된다면 한국 자본시장의 ‘레벨업’은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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