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벤처 창업자들 사이에서 ‘기우제(祈雨祭) 지낸다’는 말이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비전펀드’에서 투자받기를 바란다는 은어다. 비전펀드는 각국의 될성부른 기업에 최소 1000억 원씩 투하하며 집중 육성한다. 투자받은 기업은 막대한 자금력에 힘입어 1급 개발자 등 최고급 인력을 빨아들이며 해당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업으로 성장한다. 기우제엔 ‘투자금의 단비’를 맞기를 기원하는 창업자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
최근 이런 창업자들을 좌절시킨 일이 있었다. 창업자들은 외부 투자를 받으면 당장은 사업자금이 확보돼 좋지만 자신의 지분이 낮아진다. 때로는 경영권이 불안해져 처음부터 투자 유치를 주저하는 경우까지 있다. 한국은 ‘1주당 1개’의 의결권만 인정하는 ‘주주 평등의 원칙’을 고수하는 데에 따른 것. 벤처업계에선 1주당 2개 이상의 복수의결권을 주는 차등의결권 도입이 오랜 숙원이었다.
딱 2년 전인 2020년 1월 여당이 이를 간파하고 벤처기업에 차등의결권을 주기로 약속했다. 4·15총선을 두 달 앞둔 시점에 나온 더불어민주당의 제2호 공약이었다. 이해찬 당시 민주당 대표는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가 벤처업계에 도약의 날개를 달아주겠다”고 했고, 이인영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는 “민주당은 벤처 정당”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관련 법안 처리가 이후 지지부진하다 지난해 쿠팡이 차등의결권이 허용되는 미국 증시에 상장한 뒤부터 급물살을 탔다. 문제는 이달 초 이 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정식 안건으로조차 못 올랐다는 것. 법사위 여당 간사인 박주민 민주당 의원 등 강경파들이 “차등의결권이 재벌 세습에 악용될 우려가 있다”고 반발한 데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법안을 뜯어보면 여당 강경파들의 반대 논리가 무색해진다. 관련 법안에선 대기업에 대한 차등의결권은 원천 봉쇄됐다. 벤처기업이 기업집단(자산 총액 5조 원 이상)에 속하는 순간 차등의결권 효력이 없어진다. 창업자 지분을 상속·처분하면 보통주로 바꿔 세습 우려도 차단했다. 강경파들은 차등의결권 대신 무(無)의결권 주식을 도입하라지만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대안이다. 벤처 투자자들은 돈만 태우는 게 아니라 의결권을 갖고 기업을 함께 육성해 수익을 얻길 원하기 때문에 그간 무의결권 주식은 전무했다.
대기업 성장이 정체기에 접어든 가운데 벤처기업들이 한국 경제에 던지는 함의가 크다. 지난해 벤처 투자액이 10조 원을 돌파하는 등 사상 최대치를 나타내며 벤처기업들은 자금력을 바탕으로 대기업보다 많은 일자리를 창출했다. 지난해 벤처기업 전체 고용 인원(81만7000여 명)이 4대그룹 고용 인원(69만8000명)보다 훨씬 많다.
한국만 유별나게 차등의결권을 도입하자는 것도 아니다. 중국조차 ‘중국판 나스닥’인 커촹반(科創板)을 만들며 차등의결권을 허용하는 등 유니콘 기업이 많은 1∼4위국 모두 차등의결권을 인정한다. 글로벌 스타트업들도 이제 유니콘(기업 가치 1조 원)을 넘어 데카콘(기업 가치 10조 원)으로 향해 가고 있다. 시대가 이렇게 바뀌고 있는데 여당 강경파들은 “50년 넘게 주주 평등의 원칙을 지켜 왔다”는 낡은 사고로 재벌 타령을 하고 있다. 이는 벤처 투자 의욕을 꺾고 성장의 발목을 잡을 뿐이다. 적절한 보상으로 시장에 활력을 줘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선거철 감언이설이라도 내뱉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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