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시작은 오전 11시. 여유 있게 30분 전에 도착했지만 이미 수백 명의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헛웃음이 날 만큼 긴 줄이었다. 제10회 서울레코드페어 행사. 말 그대로 LP레코드를 사고팔기 위해 전국의 모든 판매자와 구매자가 만나는 날이다. 코로나19로 인해 2년 동안 행사가 열리지 못했고, 행사의 존폐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규모를 줄여 행사가 열렸다.
행사 규모는 줄었지만 2년 동안 LP를 향한 애호가들의 열정은 더욱 커져 있는 듯했다. 영하의 날씨에도 아침부터 이미 수백 명의 팬이 언 발을 구르고, 언 손을 녹여가며 줄을 서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 페어를 기념해 내는 한정반과 최초 공개반 등을 누구보다 먼저 사기 위해서였다. 이날 페어에는 김사월X김해원, 오마이걸, 이랑의 한정반이 판매됐고, 그동안 CD로만 나왔던 강아솔, 불독맨션, 클래지콰이 등의 음반이 LP로 처음으로 공개됐다.
그 긴 줄을 보며 한정반 사는 걸 포기하고 개인 판매자들이 음반을 팔고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 방대한 음반의 세계에서 살 만한 레코드를 고르다 잠시 밥을 먹으며 에너지를 보충하고 다시 음반의 세계로 들어가는 단순한 행위의 반복이었다. 그러다 최백호의 LP를 들고 지나가는 한 젊은이를 보게 됐다. 최백호의 앨범 ‘불혹’도 이날 최초로 LP로 세상에 선을 보였다.
찰나의 순간에 그 젊은이와 최백호와 LP를 동시에 연결짓게 됐다. 20대로 보이는 그 청년이 최백호의 음악과 친숙할 세대는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LP나 턴테이블도 마찬가지다. LP는 이미 4050세대에겐 한참 전 지나간 매체일 뿐이다. 하지만 젊은 세대에겐 새로운 매체나 다름없었고 LP가 주는 고유의 매력에 빠져들어 그들이 지금 LP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 LP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에서 한 등장인물은 “LP는 사라진 적이 없다. 계속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사람들이 죽었다 하고 또 부활했다 한다”고 꼬집었다.
그 말처럼 LP는 계속 같은 자리에서 70년 넘는 세월을 지키고 있다. 수많은 이들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처음 만나는 이들도 있었다. 최백호의 음악이 LP와 닮아있다는 생각을 한 건 그 때문이다. 최백호는 여전히 노래한다. 그의 앨범 ‘불혹’은 데뷔 40주년을 기념해 40이란 숫자에 맞춰 지은 제목이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그는 자신의 노래를 불렀다. 젊은 세대에게 어필하겠다고 어설픈 시도를 일절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나이에 어울리는 노래를 불렀고, 그와 작업한 젊은 작곡가들도 그의 목소리와 어울리는 노래를 만들어줬다. 그의 노래에는 자연스레 어른의 품격이 담겼고, 어덜트 컨템퍼러리 팝의 한 정수를 만들어냈다. 노래의 기품에 매료된 젊은이들이 최백호의 LP를 손에 들고 다녔다. LP와 최백호, 오래된 것만이 줄 수 있는 미덕 앞에선 유혹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