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때문에 2년을 못 보고 있지만 서울 은평구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란 친구 7명이 연말이면 만나는 포커모임이 있다. 여기서 언제부턴가 굳어진 규칙이 ‘테이블 머니’다. 시작할 때 1인당 판돈 상한을 정해 딱 그만큼만 꺼내 놓고 이 돈을 잃으면 탈락하는 방식이다. 우승자가 회식비, 친구들 택시비, 방 내준 집 아이들 용돈까지 책임져야 해 대부분 적자다.
포커는 돈 많은 사람에게 유리한 게임이다. 승부욕 강한 사람이 지갑에서 돈을 더 꺼내기 시작하면 판은 길어지고, 나중에 많이 잃어 낯 붉히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다. 세계적 포커대회에도 비슷한 룰이 있다. 참가자들은 동일 액수의 대회용 칩으로 경기를 치른다. ‘돈 놓고 돈 먹기 도박’이 아닌 실력, 두뇌를 겨루는 게임이 되게 하는 요소가 바로 ‘판돈 제한’이다.
이번 대선은 판돈에 제한이 없는 도박판이 됐다. 5년간 수백조 원이 들 ‘기본소득’ 공약을 내걸었다가 여론 악화로 한발 뺐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요즘 가는 곳마다 조 단위 ‘맞춤형 기본소득’을 약속하고 있다. 농어촌 살면 연 100만 원, 청년들도 100만 원, 문화예술인이어서 100만 원, 60세가 넘었는데 국민연금 수령 연령은 안 돼 120만 원, 예비군 훈련 가면 하루 20만 원, 18세 자녀까지 아동수당. 그럼 농촌에서 장년 부모를 모시고 아이를 키우는 청년이 수공예품을 만들면서 예비군 훈련을 받으면? 지금까지 한 공약을 모두 이행하는 데 얼마가 들지 이 후보 본인도 정확히 모른다는 데 ‘손모가지’를 걸까 생각해 봤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도 ‘임기 시작 100일 내 자영업자·소상공인 50조 원 지원’이란 화끈한 베팅을 했다. 다만 이 후보가 너무 가볍게 ‘콜’하는 바람에 김이 샜다. 윤 후보 측은 대통령이 된 뒤 문재인 정부 예산의 거품을 줄여 재원의 상당 부분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국가채무비율 100%가 넘으면 문제가 생기나”라는 게 신조인 이 후보는 빚을 내서라도 나눠주자는 쪽이다. 이에 윤 후보는 ‘병사 월급 200만 원’ ‘농업직불금 두 배’를 외치며 공세를 강화했다.
문제는 ‘5년 대통령 권력’이 걸린 단판 도박의 자금을 세금 내는 60% 국민, 나중에 커서 세금을 낼 자녀, 손자들이 대줘야 한다는 점이다. 이기면 대통령, 지면 감옥이란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 게임’에 열중한 플레이어들에게 미래 세대가 낼 세금쯤은 승률을 높이는 데 필요한 불쏘시개일 뿐이다. 경험상 이런 상황에서 최소한의 책임감이라도 기대하는 건 무의미하다. 이럴 때 돈을 꿔줬다간 십중팔구 판이 끝난 뒤 떼이게 된다.
한국 선거에서 퍼주기 경쟁은 처음이 아니다. 제동을 걸려는 시도도 있었다. 2012년 4·11총선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가 맞붙은 12월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 정부의 ‘합동 복지 태스크포스’는 “여야 복지공약을 모두 이행하는 데 최소 268조 원이 든다”고 발표했다. 정치권이 반발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까지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어 부적절하다”고 경고해 거기서 멈췄다. 선관위는 재작년 4·15총선 직전 문 대통령이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결정한 한국 포퓰리즘의 중대 분기점에도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다.
이런 일을 막으려면 이미 50%를 넘긴 국가채무비율에서 차기 정부가 높일 수 있는 상한을 법으로 정해야 한다. 대선후보 공약의 소요 예산을 객관적으로 계산해 ‘판돈 상한’을 정하는 방법도 찾을 필요가 있다. 지금대로라면 국가경영 능력, 비전이 아니라 미래의 국민 재산을 제 돈인 양 당겨쓰는 베팅 실력이 향후 대한민국 대통령의 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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