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적은 내부에 있다’는 우크라이나 시민들[특파원칼럼/김윤종]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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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위협보다 내부 부패가 더 심각
바른 정치, 실리 외교, ‘기본’이 우선

김윤종 파리 특파원
김윤종 파리 특파원
지난주 러시아의 침공 우려가 커져가는 우크라이나를 찾았다. 수도 키예프를 거쳐 북동부 국경도시 하르키우, 러시아 국경에서 1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곱토우카 국경검문소를 각각 방문했다. 현장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시민 10여 명에게 러시아의 위협,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문제 등을 물었을 때 공통적으로 나오는 대답이 있었다.

“러시아, 정말 싫습니다. 그런데… 우리 우크라이나부터 먼저 변해야 합니다.”

외부의 공격에 맞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부의 뿌리 깊은 부패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였다. 하르키우 시민 세르게이 씨는 “별것 아닌 민원조차 뒷돈을 줘야 공무원들이 제대로 처리해준다”며 “사회 모든 분야에서 뇌물이 만연해 있다”고 씁쓸히 말했다. 국경검문소 앞에서 만난 시민들은 “세관에 수백 달러 웃돈은 기본으로 얹어줘야 국경을 통과하기 전 화물트럭 대기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국제투명성기구 부패인식지수(CPI)에서 32점으로 180개국 중 122위였다. 유럽에서는 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순위다. 한 키예프 시민은 “오죽 부패가 심했으면 코미디언을 대통령으로 뽑았겠느냐”라고 하소연했다. 코미디언이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2015년 방영된 TV 드라마 ‘국민의 종’에서 부정부패를 비판하다 대중의 인기를 얻어 대통령이 되는 교사 역을 맡았다. 그는 TV 속 ‘반부패 전사’ 이미지를 등에 업고 실제로 정계에 입문해 2019년 진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 그조차 정부 요직을 지인들로 채웠다. 대통령궁 실장은 영화제작자, 국가정보국장은 TV 프로그램 감독 출신이다. 그러자 ‘드라마는 드라마’라는 비판이 커졌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조세피난처에 재산을 은닉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허위로 재산 신고한 공직자를 더 세게 처벌하는 개혁법안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최근 전쟁 위기의 배경 중 하나로 꼽히는 나토 가입 문제도 마찬가지다. 나토 가입을 원하는 우크라이나 정부에 대해 러시아는 자국 안보를 위협한다고 시비를 붙이며 군사 압박에 나섰다. 정작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장담하기 어렵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포함해 나토 회원국들은 부정부패와 부실한 민주주의를 이유로 우크라이나가 10∼20년 안에는 나토에 가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준비도 안 됐으면서 나토 가입을 추진해 안보 위기를 부른 현재 상황을 두고 ‘어리석은 결정’이라며 비판하는 우크라이나인이 적지 않은 이유다.

심지어 ‘성급하게 핵을 포기했다’는 의견을 내비친 시민도 있었다. 1991년 옛 소련이 해체돼 독립했을 때 우크라이나는 핵미사일 170여 기를 보유한 ‘세계 3위 핵무기 보유국’이었다. 하지만 1994년 미국 영국 러시아와 체결한 협정에 따라 안전보장을 약속받고 핵무기를 포기했다. 이 안전보장 협정은 강대국들의 ‘자국 이익 우선주의’ 속에 휴지조각이 된 지 오래다. 핵 보유를 절대 옹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당시 우크라이나가 더 치밀하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외교안보 전략을 짰다면 어땠을까.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자꾸 한반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에 둘러싸인 우리에게 우크라이나와 유사한 위기가 온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정답이 딱히 떠오르지는 않았다. 우크라이나를 교훈 삼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키우고 외교 전략을 세밀하게 다듬는 ‘국가의 기본’을 지켜야 할 때다.

#러시아#우크라이나#내부 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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