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은 조선시대 스피드 광이었다. 태종 재위 2년 9월 왕이 친히 강무(수렵대회)에 나선다고 하자 신하들은 극구 만류한다. 정몽주를 죽인 무신 조영무는 펄쩍 뛰며 “아랫사람들이 전하의 사냥을 반대하는 것은 말을 마음대로 달리다 탈이 날까 두렵기 때문”이라고 읍소한다. 비슷한 시기 태조 이성계가 중풍이 걸린 무렵에는 “태상왕이 갑자기 풍질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태종)이 평상복으로 직접 말을 달리니 시종들이 따라잡을 수 없었다”는 기록도 있다. 재위 13년 조영무는 태종의 전라도 임실 강무 참여를 또 반대한다. “임실의 산천이 험조하니 말을 빨리 달려 사냥하다 넘어져 쓰러질 염려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태종도 아버지를 닮아 그런지, 풍질(風疾·일명 풍병)을 앓았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의학서 ‘황제내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풍은 기(氣)와 하나인데 빠르고 다급하면 풍이 되고 천천히 질서가 있을 때는 기가 된다.” 중국의 고서 난경은 “풍은 간과 관계가 있으며 풍이 든 사람은 끈기 있게 일을 많이 하거나 화를 자주 내고 흥분해 기를 가라앉히지 못한다. 그러면 간이 허해지면서 신경통, 신경마비, 오십견 등의 절육통이 생긴다”고 경고했다. 스트레스가 풍질의 원인이 된다는 의미다. 이런 이들은 ‘애간장’이 펄펄 끓는 이들이다.
태종의 풍질은 분명한 증상이 있었다. 어깨와 이어진 팔의 통증, 손가락을 구부리고 펴기 힘들 정도의 손저림이 그것이다. 세종 1년에는 “어깨가 몹시 아파 의원 박윤덕이 어깨 찜질로 치료했다. 특히 오른팔이 시리고 아리며 손가락을 펴고 꾸부리는 동작도 자유롭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다. 풍질이 심할 때마다 강무를 겸해 온천을 찾아 치료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심지어 사간원은 “전하께서 춘추가 젊으시니 병환이 없으신 게 틀림없다”며 대수롭지 않아했다.
현대의학은 어깨통증의 원인을 회전근개파열, 오십견, 석회화건염, 어깨충돌증후군 등 어깨 주변 근육 문제에서 찾지만 한의학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정신의 문제와 연결시킨다. 어깨만큼 감정의 지배를 많이 받는 곳도 없다는 주장이다. 어깨는 가슴을 손과 연결하는 관절이다. 우리가 악수를 하면서 신뢰를 표시하고 연인이 손을 잡고 위로하고 사랑을 전하는 것도 손과 어깨가 마음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한방에서 어깨와 손이 함께 아플 경우 개결서경탕이라는 처방을 쓰는데, 이는 얽혀 있어 답답한 칠정(七情·7가지 감정)을 풀어 어깨근육을 회복하는 데 쓰인다.
태종은 자신의 이복동생을 왕자의 난으로 처단했고 처남들을 죽였으며 아들 세종의 장인이자 사돈인 심온을 사사하고 안사돈은 천민으로 만들어 버렸다. 재위 16년 태종은 기우제를 준비하며 “가뭄의 원인은 부자·형제의 도리에 어긋난 무인 경진 임오의 사건들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이지 내가 즐겨서 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조선을 뒤덮은 오랜 가뭄을 하늘이 주는 벌이라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선택에서 빚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그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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