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1932∼1986)는 영화를 예술의 한 장르로 승격시킨 천재로 평가받는다.
정부와의 불화와 암 투병, 빈곤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며 일곱 편의 탁월한 영화를 남긴 그에게는 ‘영상의 시인’ ‘영화계의 순교자’ 등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의 영화 대부분은 ‘롱테이크’와 심각한 대사를 특징으로 하는 만큼 형언할 수 없이 심오한 동시에 당혹스러울 정도로 지루하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작품 ‘희생’은 심오함이나 지루함과는 다른 차원에서 관객과의 특별한 소통을 제안한다.
그것은 감독 자신의 표현을 빌려 “우화 같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현대문명은 ‘허무 덩어리’
영화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주인공 알렉산더는 전직 연극배우로 아름다운 부인, 딸, 그리고 늦둥이 꼬마 아들과 함께 호젓한 바닷가 전원주택에서 살고 있다. 오늘은 그의 생일이다. 생일 축하 카드가 날아오고 몇몇 지인이 도착한다. 그런데 그들이 생일 만찬을 시작하기도 전에 뉴스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온다. 모든 사람이 패닉 상태에 빠진다. “이 전쟁이 마지막 전쟁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질 것입니다. 승자도 패자도, 도시도 마을도 풀과 나무도 우물물도 하늘의 새도 다 사라질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난생처음 신에게 구원의 기도를 바친다. “미래의 생명력과 희망을 잃은 사람들을,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종말이 다가옴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구해주소서.” 그는 신이 오늘 아침과 같은 세상을 되돌려준다면 사랑하는 가족과 집을 버리겠노라고 맹세한다. “저의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그의 맹세는 침묵 서원으로 이어진다. “평생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살겠습니다.” 날이 밝자 전쟁 뉴스는 한바탕 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가 시작된다. 알렉산더는 신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족들이 집을 비운 사이 집에 불을 지른다. 그는 정신병원에 실려 간다.
이 비현실적인 스토리를 가지고서 감독이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의 눈에 비친 현대문명은 거대한 허무의 덩어리였다. 물질만능주의의 미망에 사로잡힌 인류는 ‘정신적인 휴면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희생’ 해설에서 “말은 공허한 잡담으로 변질되고 과잉 정보가 인간을 질식시키는 시대, 정작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도 있을 진정한 메시지는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시대”에 말이 아닌 “영상과 시각 이미지”로 관객과 소통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영화에서 소통의 도구로 선택한 이미지는 나무다.
세 그루 나무가 빚어낸 우화
‘희생’에는 기본적으로 세 그루의 나무가 등장한다. 타이틀 시퀀스에 소개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회화 ‘동방박사의 경배’에 그려진 나무가 그 첫 번째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에게 선물을 봉헌하는 장면의 배경에 그려진 초록 잎 무성한 나무는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이 생명의 나무가 영화 속에서 환기되는 방식은 천 마디 말보다 직접적으로 감독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두 번째 나무는 다빈치의 나무와는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헐벗은 나무로 영화의 첫 화면에 등장한다. 알렉산더는 어린 아들과 함께 바닷가에 시든 나무를 한 그루 심는다. 아들은 얼마 전에 편도선 수술을 해서 한시적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다. 나무를 심으면서 알렉산더는 아들에게 오래된 전설을 들려준다. 먼 옛날 어느 늙은 수도사가 산에 죽은 나무를 한 그루 심고 제자에게 날마다 물을 주라고 명했다. 제자 수도사는 매일 아침 산에 올라 죽은 나무에 물을 주고 저녁이 되어야 돌아왔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수도사는 나무에 온통 꽃이 만발한 것을 발견했다. “끝없이 노력하면 결실을 얻는 법이지. 만약 매일같이 정확히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늘 꾸준하게 의식과도 같이 반복하면 세상은 변하게 된단다.”
세 번째 나무는 마지막 장면에 나온다. 알렉산더가 정신병원에 실려 간 후 영화는 그의 어린 아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아이는 전설 속의 수도사처럼 물을 채운 양동이를 들고 가 그 전날 아버지와 함께 심은 나무에 물을 준다. 아이가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은 압권이다. 카메라는 천천히 수직으로 상승하며 나뭇가지를 클로즈업한다. 오늘의 나무는 어제와 같은 나무이지만 동시에 완전히 다른 나무이기도 하다. 산들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찬란한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 물결이 보인다. 갑자기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온 듯한 따사로운 기운이 화면에서 쏟아져 나온다. 관객은 나무 아래 누운 아이의 눈으로 나무를 올려다보며 이 나무에 조만간 잎이 무성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아주 자연스럽게 품게 된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르네상스 회화의 초록빛 나무와 20세기 영화 속의 말라빠진 나무는 하나로 합쳐져 마법처럼 새로운 시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 기대치 않은 융합에서 터져 나오는 강렬한 에너지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가 영화의 관람 포인트일 것 같다.
‘희생’은 ‘희망’의 다른 이름
타르콥스키는 죽은 나무와 수도사에 관한 전설이야말로 자신의 창작 이력에서 가장 중요한 토대였다고 술회한다. 여기서 문제는 수도사가 같은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수도사는 의심도 타산도 없이 희망을 품고 자신의 일에 헌신했다. 그것은 죽은 나무까지도 되살리는 끈질긴 희망, 희망에 대한 희망, 오로지 굳건한 믿음만이 가져다주는 희망이었다. 타르콥스키에게는 그런 희망만이 유일한 진실이었다. “어느 날 일어나 보니 나뭇가지가 어린잎들로 뒤덮여 있다. 이것이 과연 기적일까? 이것은 진실이기도 하다.” 이렇게 타르콥스키의 의중을 헤아리며 영화를 관람하다 보면 제목의 의미가 사뭇 다르게 와 닿는다. 그에게 ‘희생’이란 곧 희망을 의미했던 것이다.
타르콥스키는 1985년 빈곤과 병고에 시달리며 스웨덴에서 ‘희생’을 완성하고 이듬해에 세상을 하직했다. 영화는 감독의 헌사로 마무리된다. “이 영화를 아들 안드류샤에게 바칩니다. 희망과 확신을 담아서.” 이 헌사는 감독의 아들뿐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 엄혹한 시대에 고통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이를 향한 감독의 마지막 메시지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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