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현지 시간) 이집트 카이로 인근의 신도시 헬리오폴리스를 찾았다. 시내 중심가에 ‘나빌와카드’ 거리가 있다. 1963년 이집트가 북예멘 내전에 참전했을 때 이집트 군인 중 처음으로 사망한 나빌 와카드(1936∼1963)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붙였다. 당시 북예멘의 전신 무타와킬 왕국의 존립을 둘러싸고 왕정주의자와 군부를 주축으로 한 공화주의자가 맞붙었을 때 이집트는 공화파를 지원해 승리했다.》
약 60년이 흐른 지금도 예멘은 내전 중이다. 1990년 북예멘과 남예멘이 통일을 이뤘음에도 고질적인 남북 갈등이 여전한 가운데 2014년부터는 시아파 후티 반군과 정부군이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다. 특히 후티와 정부군은 각각 시아파 맹주 이란, 수니파 맹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고 있어 이란과 사우디의 대리전 성격 또한 강하다. 양측 모두 중동 전체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절대 예멘에서 물러날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후티는 지난달에만 수니파 아랍에미리트(UAE)에 세 차례 미사일 공격을 가하며 ‘세계의 화약고’ 중동의 긴장을 더 고조시키고 있다.
내부 갈등서 탄생한 후티
후티의 등장 배경에는 예멘의 복잡한 근현대사가 있다. 중세부터 북부 산악지대에는 시아파, 남부 평야지대에는 수니파가 주로 거주했다. 또 수도 사나가 있는 북예멘은 1918년까지 오스만튀르크가, 석해균 선장 사태로 친숙한 항구도시 아덴이 있는 남예멘은 1967년까지 영국이 지배했다. 이후 북예멘은 무타와킬 왕국을 거쳐 공화제를 채택한 반면 남예멘은 공산 정권을 수립해 1990년 통일 후에도 이념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북부가 남부에 비해 가난한 것 또한 양측 갈등을 부추겼다. 특히 낙후된 사다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시아파 분파 ‘자이디’파가 많았다. 북예멘은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와 국경을 맞댄 데다 예멘 인구 약 3100만 명의 57%가 수니파여서 자이디파의 불안감이 상당했다.
이에 1994년 자이디 성직자의 아들 후세인 알후티(1959∼2004)와 형제들이 ‘수니파 침투를 막자’며 청년 단체를 조직한 것이 후티의 기원이다. 후티는 가난에 지친 젊은층을 규합해 빠르게 세를 불렸다. 특히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반미, 반정부를 외치며 본격적인 무력 투쟁에 나섰다. 또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 유대인에게 저주를! 이슬람에 승리를!’ 같은 공격적인 슬로건을 채택하며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후세인이 2004년 정부군과의 교전으로 숨진 후 동생 압둘말리크(40)가 후티를 이끌고 있다.
후티는 중동의 민주화 시위 ‘아랍의 봄’이 발발한 2011년 국제 정세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 사태로 북예멘 주도의 남북통일을 이끌었으며 1978년부터 33년간 집권한 알리 압둘라 살레 당시 대통령이 실각했다. 압드라보 만수르 하디 새 대통령은 집권 초만 해도 “사다 등 일부 지역에서 후티의 관할권을 인정하겠다”고 했다.
하디 정권이 변심하자 분노한 후티 또한 이란을 끌어들인다. 이란을 업은 후티는 2014년 9월 사나를 장악하고 하디 대통령을 몰아냈다. 그러자 2015년 3월 사우디 또한 UAE, 바레인 등 수니파 국가를 규합해 후티와 맞섰다. 이 와중에 이슬람국가(IS), 알카에다 아라비아지부 등 무장단체 또한 난립하고 남예멘만의 독립을 주장하는 남부 분리주의 운동까지 득세해 예멘 전체가 아비규환에 빠졌다.
반군, 文 머물던 두바이 공습
사우디에 우호적이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퇴임 직전인 지난해 1월 후티를 테러 단체로 지정했다. 그러나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이 조치를 철회했다. 취임 전부터 이란 핵합의 복원을 외교 정책의 주요 과제로 내세웠던 바이든 행정부로선 이란을 자극하지 않을 조치가 필요했다. 예멘 내전 장기화로 37만 명이 희생된 상황에서 미국산 무기의 주요 수입국인 사우디가 후티는 물론 민간인까지 공격한다는 미국 내 비판 여론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2018년 8월 사우디군이 사다 지역의 통학버스를 공격해 약 50명의 학생이 숨졌다.
이런 바이든 행정부의 태도는 내전 판세에도 큰 변화를 가져 왔다. 후티는 지난해 2월부터 정부군이 장악한 원유 산지 마리브주를 집중 공격했다. 후티는 한때 주도(州都) 마리브시의 20km 앞까지 전진하며 정부군을 압박했다. 이에 정부군과 수니파 연합군 또한 마리브 수호를 위해 병력과 물자를 대폭 늘렸다. 1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매주 많게는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로 마리브 공방전이 치열한 상태다.
후티는 올 들어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지난달에만 세 차례 UAE를 공격했다. 지난달 3일 후티는 홍해를 지나던 UAE 선박 ‘라와비’호를 나포했다. 같은 달 17일에는 미사일과 무인기(드론)를 통해 UAE 양대 도시 아부다비와 두바이를 공습했다. 당시 중동을 순방 중이던 문재인 대통령이 머물던 두바이에서는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으나 수도 아부다비에서는 3명의 사망자와 6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격분한 UAE 또한 후티가 점령하고 있는 사나에 대대적인 공습을 가했다. 수니파 연합군은 지난달 말 하루 50, 60회의 대규모 공습을 가했다. 후티 또한 이츠하크 헤르초그 이스라엘 대통령이 아부다비에 머물던 지난달 31일 아부다비를 또 미사일로 공격했다. 후티는 UAE가 경제 활성화 등을 위해 이스라엘과 손잡는 것 또한 거세게 비판하고 있다.
늘어나는 피해
끝나지 않는 내전은 빈곤, 불평등, 인권 같은 고질적 문제를 더 키웠다. 2018년 국제통화기금(IMF) 기준 예멘의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불과 925달러(약 111만 원)로 세계 177위다. 인구의 절반이 넘는 1700만 명이 식량난을 겪고 있고, 200만 명의 어린이는 급성 영양실조로 치료가 시급하다.
성인 1명당 평균 3정의 총기를 보유할 정도로 치안 역시 불안하고 부족국가의 특성이 강해 사실상 상당수 주민들이 중세 시대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성 격차 지수 또한 세계 144개국 중 꼴찌이며 문맹률 또한 50%가 넘는다. 국제사회의 지원 또한 먼저 내전이 발발한 시리아에 집중됐다. 미 외교매체 포린폴리시(FP) 등이 예멘 내전을 ‘세계 최악의 인도주의적 재앙’이라고 지적한 이유다.
단기간 내 사태 해결 또한 쉽지 않아 보인다. 권력 분할에 대한 후티와 정부군의 이견이 큰 데다 사우디와 이란의 대립 또한 여전하다. 특히 양측은 후티의 근거지 사다 지역이 사우디 남부와 맞닿아 있다는 이유로 “절대 예멘에서 먼저 물러날 수 없다”는 완강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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