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미국 워싱턴의 한 외교안보 싱크탱크가 주최한 화상 세미나에 한국 프로야구단의 유니폼들이 배경으로 등장했다. 다채로운 색깔의 야구복들이 진행자 뒤쪽 벽에 줄줄이 걸렸다. ‘한국 야구와 한미 관계’라는 이례적 주제 선정부터 화면 구성, 진행까지 총괄한 이는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 워싱턴에서 접속한 청중들은 놀랍지도 않다는 반응이었다.
▷리퍼트 전 대사의 ‘한국 사랑’은 진지하다. 퇴임 후 5년이 지났지만 그는 요즘도 한반도 관련 세미나에 참석할 때마다 한국말로 인사하고, 최신 한국 뉴스들을 소개한다. 두산 베어스의 광팬으로 KBO리그 점수를 실시간 업데이트하면서 치맥을 즐긴다. 두 자녀는 한국이름 ‘세준’, ‘세희’가 새겨진 책가방을 메고 주말 한글학교를 다닌다. 이런 진심 때문일까. 그가 삼성전자 북미 총괄 대외협력팀장(부사장)으로 영입됐다는 소식을 워싱턴과 서울은 모두 반기는 분위기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리퍼트 전 대사를 삼고초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튜브 임원으로 근무해온 그를 영입하기 위해 적잖은 공을 들였다는 후문이다. 미국 전직 고위인사의 대기업 스카우트가 처음은 아니지만, 활동 분야가 반도체 산업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관심을 끈다. 반도체는 미중 간 기술패권 경쟁의 핵심으로 떠오른 전략물자. 미국의 관련 정책과 입법 동향을 발 빠르게 파악해 대응하려는 주요국들의 정보전과 로비전, 인재영입전이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서로 수출 통제와 제재의 칼을 휘두르는 ‘반도체 전쟁’의 유탄이 언제 어떻게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리퍼트 전 대사 앞에는 많은 난제가 기다리고 있다. 미중 간 경쟁 사이에 끼인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기회만큼이나 많은 위기를 떠안아야 한다. 삼성과 SK하이닉스 등은 지난해 미 상무부로부터 대외비로 분류되는 민감한 반도체 수급 자료 제출을 요구받았다. 대만 TSMC 같은 해외 반도체 기업들과의 경쟁도 불붙고 있다. 백악관, 상무부 고위인사들과의 면담 섭외 또한 까다로운 미션이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이재용 부회장의 방미 당시 추진했던 조 바이든 대통령,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의 면담은 끝내 불발됐다.
▷미국을 상대해야 하는 해외 기업들에 전직 고위인사가 지닌 폭넓은 네트워크는 강력한 자산이다. 리퍼트 전 대사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렸던 측근으로 민주당 인사들과의 친분이 두텁고 현직 인사들과의 접촉면이 넓다. 펜타곤의 인도태평양 차관보 사무실에는 아직도 전직이었던 그의 사진이 걸려 있다. 경제안보의 시대에 특정 기업을 넘어 양국 간의 경제협력에서 그가 펼칠 더 큰 역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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