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사라진 겨울 동산의 삭막한 풍광 속에 시인의 눈길을 끈 매화. 잎과 가지와 향기가 수묵화처럼 간결하고 과묵하다. 개울물에 듬성듬성 그림자를 드리웠고 저녁 달빛 아래 은은히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 이 가만한 여백미에 다가서는 시인의 마음은 그지없이 흐뭇하다. 마침내 시인은 매화의 자태와 운치를 보다 극적으로 드러내려 우격다짐하듯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한다. 백로가 찾았다면 내려앉기 전에 먼저 그 고운 자태를 힐끔 곁눈질했을 테고, 겨울과는 인연이 없는 나비가 매화의 존재를 알았다면 아마 넋을 잃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요란한 음악이나 술자리가 없어도 그저 시를 읊조리는 것만으로 의기투합할 수 있는 매화라니, 시인에게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호사인가.
‘흰 눈 가득한 산에 군자가 누워 있는 듯, 달 밝은 숲 아래 미녀가 찾아온 듯’(고계·高啓, ‘매화’)이라 한 것처럼 매화는 옛 선비에게 물질로서의 꽃이라기보다는 고결한 기품을 지닌 인격체나 다름없었다. 퇴계는 매형(梅兄)이라고도 불렀다. 한천(寒天)을 견디며 ‘일생을 추위 속에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신흠·申欽) 그 고절(孤節)을 닮으려는 의지는 선비라면 누구나 품었음직한 오랜 욕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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