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과학기술이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생활에 밀접한 것에서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는 일까지 다양한 숙제가 이야기된다. 가령 산업현장 근로자를 보호하는 안전한 에어백 조끼를 만들거나 녹조로부터 안전하고 깨끗한 물을 가정에 공급하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나아가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미래 에너지를 개발해, 사회와 국가의 불평등과 소외계층에 도움을 주는 기술 개발도 고민하고 있다. 갑작스레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과학기술이 이야기되는 이유는 뭘까? 과연 과학은 그간 사회문제를 외면해 왔던 것인가?
그동안 과학은 많은 사회적 고민을 훌륭히 풀어왔다. 옛날에는 제때 씨를 뿌리고 수확하며 홍수와 가뭄을 예측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를 위해 과학은 하늘을 관찰하고 별의 움직임을 이해했다. 지역마다 계절의 변화가 조금씩 다르다. 나라마다 정확한 달력을 만드는 것이 국가의 과학 경쟁력이었다.
나아가 배고픔을 조금 더 해결하기 위해 품종을 개량하고 비료를 개발했다. 이 즈음부터 매해 거둬들이는 수확량이 급증하고, 소비하는 것보다 많은 곡식을 수확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쌓이는 식량 덕에 부를 축적하고, 세계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인 산업혁명도 과학기술에서 나왔다. 경제발전은 삶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먹고살기에 급급했던 인류는 남는 시간을 활용해 문화를 즐기고 삶의 여유를 갖게 된다. 발달한 교통수단 덕분에 해외여행은 물론이고 우주여행도 가능하다. 멀리 있는 친구와 화상전화를 하고, 화려한 공상영화도 만든다.
지금까지 사회가 기대했던 과학기술의 역할은 경제발전이 주였다. 발전한 사회는 더욱 많은 과학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생존과 산업뿐 아니라 삶의 질을 더욱 높이고 전 지구적 문제를 해결해 인류가 더욱 오랜 기간 동안 지구에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 불평등이나 저출산 해결에도 역할이 없는지 묻는다. 그간 풀어왔던 사회의 문제보다 훨씬 넓은 영역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숙제가 펼쳐진 것이다.
코로나19 대유행을 겪으며 많은 사람들의 과학적 지식이 깊어졌다. 그와 함께 과학과 대중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질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 방역 조치는 시민, 특히 소상공인의 경제적 삶을 위협하고 있다. 어려워진 삶을 국가와 사회가 나서 보호하는 안전망이 함께 따라야 한다.
과학적으로 옳은 일이라도 사회가 받아들이려면 과학 이외에도 생각해야 할 게 많다. 시장 역시 그렇다. 기술이 뛰어난 제품이 무조건 성공하지 않는다. 아무리 첨단기술이 집결된 제품이라도 턱없이 비싼 물건에 지갑을 열 소비자는 없다. 사회가 수용하지 못할 만큼 너무 앞선 기술이 자리 잡기는 어렵다.
1985년 영국에서 획기적인 전기자동차가 소개된다. 처음 등장했을 때는 폭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세상을 바꿀지도 모르는 운송수단으로 여겨졌다. 당시 영국은 심각한 교통체증과 공해가 있었다. ‘싱클레어 C5’로 불리는 전기자동차는 한 명이 타는 작은 크기와 저렴한 가격을 앞세웠다. 당시 제도로는 운전면허가 필요 없지만 교통 체증 속에서의 출퇴근에는 문제가 없는 시속 24km까지 달리도록 설계되었다. 하지만 이 발명품은 철저히 시장의 외면을 받았다. 오토바이처럼 비를 그대로 맞아야 한다거나 당시의 배터리로는 가속이 느리고 언덕길 오르는 게 힘들다는 등의 약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1인용으로 설계된 차체가 너무 작아서 다른 자동차의 운전자가 바닥에 바짝 붙어있는 C5를 볼 수 없었다. 기술적 한계보다도 이미 길거리를 지배하는 자동차라는 사회가 새로운 제품을 수용하지 못했다.
요즘 전기차나 수소차 판매가 늘고 있다. 그와 함께 주유소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충전소의 불편함도 커지고 있다. 이것 역시 사회적 수용성이다. 주유소는 전기차가 아주 많아야만 충전소로 업종을 전환해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 하지만 소비자는 불편한 충전 인프라 탓에 전기차 구입을 망설인다. 그러면 국가가 나서서 세금으로 충전소를 늘려야 할까? 새로운 제품과 산업의 수용에 사회적 비용이 들고 합의가 따라야 한다.
한편 사회가 뒤늦게 바뀌어서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있다. 자동차가 보급되기 전에는 주로 마차를 타고 다녔다. 자동차가 등장하며 일자리를 잃게 된 영국 마부들의 사회적 저항은 1865년 우스운 법을 만들었다.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이 자동차 앞에서 걸어가며 차가 온다는 것을 알린다. 자동차는 사람이 뛰는 속도보다 느리게 달린다. 안전에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한동안 자동차의 보급을 막았다. 결국 자동차로의 대전환의 물결을 가로막지 못하고 희한한 제도는 곧 사라진다. 하지만 그사이 뒤처진 건 영국의 자동차산업 경쟁력이다.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건 어렵다. 하물며 사회 체계가 바뀌고 많은 비용이 든다면 저항이 클 수밖에 없다. 규제를 없애거나 인프라를 고치는 것보다 아예 도시를 새로 만드는 게 쉽다. 과거를 버리지 못한 탓에 잘나가는 기업이 한순간에 망하고, 국가의 운명도 흔들리곤 한다.
우리는 또 다른 대변혁, 대전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과학의 역할은 과거보다 훨씬 커졌다. 얼마 전 과학 석학들의 모임인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는 젊은 과학자와 언론인이 모여서 과학이 사회, 특히 선거에서 외면 받는 현실을 고민하였다. 불필요한 다툼이 지배하고 과학이 사라진 세상. 자칫 잘못하면 우리나라도 영국의 붉은 깃발을 드는 우를 범할지 모른다. 과학기술이 계속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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