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문화재청은 백제 금동신발 두 켤레를 보물로 지정했다. 그간 발굴된 수십 점의 금동신발 가운데 명품 반열에 오른 첫 사례였다. 다른 금동신발에 비해 보존 상태가 좋고 정교한 무늬까지 갖춰 보물로 지정됐다고 한다.
금동신발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매우 특징적 유물이다. 세계 각지로 시야를 넓혀 보더라도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귀금속으로 만든 신발을 찾아보기 어렵다. 더욱이 일본 열도의 금동신발은 출토 사례가 많지 않은 데다가 백제에서 전해졌거나 백제의 영향을 받아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금동신발의 중심지는 고구려, 백제, 신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백제의 금동신발은 크기가 대체로 30cm를 넘으며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그리고 측판과 바닥판에 용이나 봉황 등 상상의 동물 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진 경우가 많다. 백제 사람들은 왜 이처럼 크고 화려한 금동신발을 만들었고, 또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 옹관 무덤 속 금동신발
1917년 조선총독부 직원들은 전남 나주 신촌리에서 봉분의 한 변 길이가 30m나 되는 큼지막한 무덤 하나를 파헤쳤다. 바로 신촌리 9호분이다. 이 무덤 속에는 큰 독을 이어 만든 옹관 여러 기가 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 을관(乙棺)이라 이름 붙인 옹관은 길이가 2.5m에 달했다. 깨진 독 조각을 차례로 들어내자 유해는 남아 있지 않았으나 망자에게 착장시켰던 것으로 보이는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나왔다.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모습이었다. 특히 금동신발의 표면에는 신발의 형태에 맞춰 칭칭 감은 마포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이는 삼국시대 고분에 금동신발이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첫 사례였다. 그러나 발굴자는 이 금동신발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금동신발 표면에 감겨 있던 삼베는 발굴 이후 모두 제거됐다. 이 신발의 착용 방식을 밝힐 수 있었던 결정적 단서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발굴자는 총독에게 “장례 방식과 유물로 보아 이 고분에 묻힌 사람들은 왜인(倭人)일 것”이라고 발굴 결과를 보고했다. 신촌리 금동신발 소유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광복 이후 영산강 유역 고분에 대한 발굴과 연구가 진전되면서 비로소 바로잡혔다.
○ 인면조 새긴 정교한 조각
1924년 우리나라 금동신발 가운데 가장 정교한 사례가 경주에서 발굴됐다. 발굴의 당초 목적은 금동신발이 아니었다. 금관을 발굴하라는 총독의 지시를 받고 조선총독부 직원들이 금관총 주변의 폐고분 2기의 발굴에 나선 터였다. 그들은 금방울이 출토된 무덤에 금령총(金鈴塚), 화려한 금동신발이 출토된 무덤에 식리총(飾履塚)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들은 금령총 발굴을 먼저 마무리한 다음 식리총 발굴에 본격 나섰다. 금령총에서 금관이 출토됐기에 이 무덤에서도 금관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으나 기대는 빗나갔다. 그 대신 발굴자들은 식리총 내 썩어 내려앉은 목관 부재 틈새에서 금동신발 한 켤레를 발견했다. 이 금동신발은 발굴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삼국시대 금동신발 가운데 가장 정교한 유물로 손꼽힌다. 신발 바닥 가장자리엔 불꽃무늬가 둘러져 있었고, 안쪽 한 부분엔 인면조, 새, 괴수 등 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바닥판에는 일정 간격으로 연꽃무늬가 조각돼 있었는데, 꽃무늬의 중앙에는 금동 스파이크가 박혀 있었다.
이 신발은 이후 오랫동안 뛰어난 신라 금속공예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 유물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같은 시기 신라의 금속공예품과 비교하면 제작 수준이 현격히 높아 외부에서 들여왔을 가능성도 꾸준히 제기됐다.
○ 백제 무령왕릉에서도 출토
1971년 발굴된 백제 무령왕릉에서는 왕과 왕비의 화려한 금동신발이 나란히 출토됐다. 왕의 신발에는 연꽃과 봉황무늬가, 왕비의 신발에는 봉황과 팔메트(중동에서 유래한 좌우 대칭 구조의 식물 상징) 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이후 익산 입점리, 공주 수촌리, 서산 부장리 등지의 백제 고분에서 연이어 무령왕릉에 선행하는 금동신발이 발굴되면서 백제 금동신발은 신라와 다른 스타일임이 밝혀졌다.
2009년 전북 고창군 봉덕리 1호분 4호 석실에서 보존 상태가 완벽한 금동신발 한 켤레가 발굴됐다. 그것에 새겨진 인면조, 연꽃, 봉황무늬 등은 식리총 신발과 매우 유사해 눈길을 끌었다. 5년 후 발굴된 나주 정촌고분 1호 석실에서도 봉덕리에 버금가는 금동신발이 출토됐다. 다만 발등 쪽에 큼지막한 용머리 모양 장식이 부착된 점이 특이했다. 연이은 발굴로 백제 금동신발의 양식적 특징이 밝혀졌고, 그로 인해 식리총 신발의 제작지를 백제로 특정할 수 있게 됐다. 식리총 신발은 아마도 나제동맹이라는 정치적 배경으로 인해 신라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 사후 세계로 가는 ‘통행증’
이처럼 백제에서는 왕족이나 지방 유력자의 무덤에 백제 스타일의 금동신발을 함께 묻었다. 그런데 금동신발은 관, 귀걸이 등 여타 장신구와 달리 실생활에서 사용하기엔 취약한 구조를 지녔다. 만약 금동신발을 신고 걸으려 한다면 단 한 걸음도 떼기 전에 바로 찌그러져 버릴 것이다.
금동신발은 백제 왕실의 장례용품이었다. 화려하고 귀한 금동신발을 무덤에 넣으면 사후 세계에서도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결국 금동신발은 영생을 향한 소망을 담은 사후 세계로 가는 ‘통행증’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왕실의 특별한 장례용품을 어떻게 지방 유력자들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근래의 여러 연구에 따르면 당시 백제 국왕이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현지의 유력자들을 친족처럼 대우해주면서 그들과 왕실 전용 장례용품을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 5세기 초 이래 약 1세기 동안 존속했던 백제의 금동신발은 538년 사비천도 이후 사라진다. 부여로 도읍을 옮긴 이후 백제 사회는 변화를 거듭했고 장례 풍습도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그 과정에서 백제 왕족의 사후 ‘패스포트’로 기능하던 금동신발이 자취를 감춘 것으로 추정된다. 장차 새로운 발굴과 깊이 있는 연구가 이뤄져 이러한 추정이 역사적 사실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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