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후보자들끼리 공방이 일면서 화제가 된 용어들이다. 환경 전문가나 기후변화에 민감한 환경 덕후가 아니면 평생 한 번 들을까 말까 한 단어들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RE100은 재생에너지 100%의 줄임말로 사용전력의 100%를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조달한다는 의미다. 그린 택소노미는 특정 산업을 친환경으로 간주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친환경 분류체계이고, 넷제로는 기업이 탄소배출량만큼 흡수량을 늘려 실질적인 배출량을 제로로 만든다는 탄소중립이다. 모두 기후 위기의 주범인 탄소 배출을 줄이고 친환경 에너지를 늘리자는 취지에서 나왔다.
이런 전문용어를 어떤 후보는 아네 모르네를 두고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잠잠해졌지만 탄소중립 이슈는 당사자인 기업들에는 생사가 걸린 문제다. 글로벌 자본은 기후 위기에 소극적으로 대응하거나 산업 재해를 방치하는 기업, 지배구조가 불투명한 기업에 투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투자한 자금도 거둬들이겠다고 벼르고 있다.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의미하는 ESG가 기업들의 새로운 경영 규범으로 떠오른 이유다.
국내 대기업들은 특히 국제적 관심이 쏠리고 있는 환경 이슈에 수조 원에 이르는 돈을 써가며 대응하고 있다.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해 생산 공정을 개선하고, 탄소포집 기술을 개발하고, 탄소배출권을 사들이고, 화석에너지를 재생에너지로 대체하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에 대한 외부의 평가는 인색하다. 지난주 유럽 최대 연기금인 네덜란드 연금자산운용(APG)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대기업 10곳에 탄소 감축 노력이 부족하다며 경고장을 보냈다. 지난해 7월에는 국제환경단체인 그린피스가 국내 10대 그룹에 낙제점에 가까운 성적표를 줬다. 일찌감치 ESG에 나서 비교적 모범이라는 평가를 받는 기업들조차 C등급을 받았을 뿐 나머지는 D등급 이하다.
하지만 기업들만 탓할 일은 아니다. 2020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재생에너지 비율은 6.4%로 세계 평균(26%)을 한참 밑돈다. 영국 독일 등 서유럽 국가들이 40%에 육박하고, 미국과 일본도 17%대다. 기업들은 당장 반도체도 생산하고 자동차도 만들어 수출해야 하는데 이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는 것 자체가 불가한 셈이다. 재생에너지를 늘리자고 생산 가동률이 15∼20%에 불과한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을 막무가내로 지을 수도 없다. 기업한테 숙제만 줄 게 아니라 정부와 정치권이 현실적인 에너지 대책과 비전을 먼저 내놓아야 한다.
대선 주자들의 RE100 논쟁은 언급 자체만으로도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환기하고 탄소 저감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퀴즈쇼처럼 해프닝으로 끝날 한가한 주제가 아니다. 재생에너지가 풍부해 일찌감치 RE100을 선언한 글로벌 기업과 경쟁해야 하는 우리 기업들엔 죽고 사는 절박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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