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패스’ 규제의 위험성[오늘과 내일/김용석]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2월 26일 03시 00분


공익 위한 규제라도 까다로운 절차 거쳐야
손쉬운 길 택하면 리스크 커지고 진보 막혀

김용석 산업1부장
김용석 산업1부장
상상으로나마 한 번쯤 바꿔봤음 좋겠다고 생각하는 제도가 하나 있다. 월급 받는 근로소득자에 대한 세금 원천 징수다. 지금은 회사가 소득세 등을 미리 떼고 줘 그냥 세후 급여를 내 월급이라 여긴다.

만약 세전 급여를 모두 통장에 넣어준 뒤 소득세 등을 따로 걷으면 어떻게 될까. 주머니에 들어온 ‘피 같은 내 돈’이 빠져나가는 데 신경이 곤두설 것이다. 손쉽게 세금을 걷지 못하는 만큼 정부는 세금을 재원으로 하는 각종 ‘공짜 정책 시리즈’를 내놓는 데도 훨씬 더 조심스러워지지 않을까.

어떤 일을 할 때 상대방 반응을 살피거나 개방된 논의 절차를 거치는 것만으로도 엄격성을 높이거나 숙의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렇지 않고 공짜로 ‘프리패스’ 하는 데 익숙해질수록 상대방의 존재감은 미미해지게 마련이다. 상황이 좀 다르긴 하지만 한 영화에서 이런 명대사가 나왔다. “호의가 계속되면 (상대방은) 그게 권리인 줄 알게 돼.”

정부가 규제를 만드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이해관계에 놓인 사람들 의견이 치열하고 투명하게 노출되는 국회 심의 등 절차를 거치는 것만으로도 다양한 측면을 미리 고민하고 반영하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함께 분석해 보니 현 정부에선 손쉬운 절차를 택한 규제 입법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국회 논의를 거치는 법률 대신 정부 안에서 만드는 시행령, 시행규칙 등 하위 법령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지난 정부보다 많았다. 또 규제를 새로 만들거나 강화할 때 정부와 민간위원이 참여하는 규제개혁위원회 본심사를 거친 비중도 크게 줄었다. 규제가 만들어지는 절차가 건강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다. 예를 들어 기업 사외이사 재직 기간을 제한하는 규제가 그랬다. 개인 권리 중 하나인 직업 선택 자유가 제한될 우려가 있는데도 시행령 개정 절차만으로 규제를 만들었다.

국무조정실은 규제개혁위원회 본심사 비중이 줄었다는 보도에 대해 본심사에 앞선 예비심사를 통해서도 면밀하고 충분한 검토가 이뤄지고 있다고 반박했다. 예비심사만으로 면밀하고 충분하다면 본심사 절차는 왜 둔 것인지 묻고 싶다.

사실 기업 현장에선 법이나 시행령, 시행규칙으로 만들어지는 규제는 그나마 양반이라고 말한다. 어디서 누가 얼마나 만드는지 손에 꼽히지도 않는 수많은 가이드라인이야말로 훨씬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강제성이 없는 권고라는 명분으로 적절한 견제가 이뤄지지 않은 채 양산되고 있다.

일례로 금융 분야에선 보안 관련 가이드라인을 사실상 산하 기관인 특정 기관에 맡겨 제정, 시행하기도 한다. 이를 어기면 시장에서 퇴출된다. 업계 한 관계자는 “가이드라인 때문에 다양한 기술 대안을 적용할 자유, 기술 발전 가능성을 제한받는다. 그런 기준을 한 기관이 만들고 운영하는 건 마치 입법권과 행정권을 모두 갖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규제가 공공 이익을 위한다고 해서 항상 합당한 것은 아니다. 그로 인해 제한되는 개인과 기업 등의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필요한 규제라고 해도 그 범위와 수준을 정하는 논의 과정은 팽팽하고 투명한 긴장관계에 놓여 있어야 건강한 것이라고 믿는다. 규제 검토 허들을 낮추는 정부의 ‘프리패스’가 이어진다면 그 자체로 사회의 진보를 막는 리스크가 될 것이다.

#프리패스#근로소득자#세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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