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흥미로운 설문조사 결과가 실렸다. ‘일본의 경제력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강하다’는 28%로 ‘약하다’(32%)를 밑돌았다. ‘강하다’는 응답은 2018년 37%, 2019년 33%로 갈수록 떨어졌다.
정치력 군사력 외교력 등 다른 국력에 대한 자신감도 크게 낮았다. 정치력에 대해 ‘약하다’는 46%로 ‘강하다’(8%)보다 5배 이상이었다. 군사력(약하다 45%, 강하다 11%), 외교력(약하다 51%, 강하다 7%)도 유사한 경향을 보였다.
격세지감이다. 1970년대 고도 경제성장기 일본에선 ‘1억 총중류(總中流)’란 말이 유행했다. 전 국민이 중산층에 해당한다는 말이니, 국민 모두가 잘산다는 자신감이 스며 있다. 1980년대 후반 일본 반도체가 세계를 석권했을 무렵에는 ‘도쿄 땅을 팔면 미국 땅 전체를 살 수 있다’는 말도 나왔다. 세계 1위 미국 경제를 넘어설 기세였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 거품경제가 폭발하면서 상황은 180도 바뀌기 시작했다.
‘자신감 저하’는 현재 일본 사회를 꿰뚫어볼 수 있는 중요 키워드다. 옛날 같으면 한국에 대한 과거사 부채 의식으로 한발 물러설 일도 요즘은 ‘한국에 밀리면 안 된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여유가 없어지는 느낌이랄까.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서도 ‘한국이 해법을 가져오라’는 태도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한일 관계는 3년 이상 얼어붙어 있다.
하지만 9일 실시되는 한국 대통령 선거가 양국 관계 개선의 분수령이 될 수 있다. 최근 일본 정치권과 정부 내에선 한국의 새 대통령과 어떻게든 양국 관계를 개선시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다행이다. 다만 징용 배상 문제는 여전히 핵심 걸림돌이다. 사법 절차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고, 배상 명령을 받은 일본 기업 자산은 점차 강제 매각(현금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일본 측은 한일 정상이 악수하며 “잘해 보자”고 합의했는데 바로 다음 날 배상 판결을 받은 일본 기업 자산이 강제 매각돼 버리는 상황 전개를 가장 우려한다. 그럴 경우 섣불리 한국과 악수했다는 국민적 비판이 커져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다. 한국 측도 난감하다. 새 대통령이 탄생하더라도 행정부 수반이 사법부 판단을 뒤바꿀 수는 없다.
최근 발간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정책공약집의 대일 정책 부분엔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일본 총리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투 트랙 기조’ ‘올바른 역사 인식’ 같은 수식어가 붙긴 했지만 두 정당 모두 미래지향적 관계에 방점을 찍었다.
새 대통령은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구축을 위해 ‘용기’를 낼 것을 제언한다. 일본을 향해 큰소리를 치라는 것이 아니다. 한국 내부를 향해 용기를 내야 한다는 말이다. 징용 피해 당사자와 주변 강경파를 설득하고 이해를 구해가며 징용 문제 타협책을 만들어야 한다. 일본 측 역시 ‘용기’가 필요하다. 팔짱 낀 채 한국이 내민 타협책에 점수만 매겨서는 관계 개선으로 이어지기 힘들다. 한국과의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과거사에 눈을 감는 집권 자민당 일부 강경파가 대한(對韓) 정책을 좌지우지하게 해서도 안 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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