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너머로 밝은 목소리가 명랑하게 들려왔다. ‘신이 숨겨 놓은 직장’이라 불리는 알짜 공기업을 지난해 그만둔 최유안 소설가(38)였다.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는 올해 1월 출간한 첫 장편소설 ‘백 오피스’를 쓰기 위해 사표를 냈다고 했다. 결단력이 놀라웠지만 마냥 축하를 건넬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오랜 시간 고민했다고 한다.
“큰 프로젝트가 이어져 소설을 쓸 시간이 없었어요.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짓눌리다 내 갈 길을 가자고 결심했죠.”
그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했던 말이 떠올랐다. 평소 딸을 묵묵히 지켜보던 어머니는 업무에 지친 몸으로 꾸역꾸역 글을 쓰는 딸에게 처음으로 물었다. “소설이 너에게 뭐니?” 그는 말했다. “난 소설가로 죽고 싶어.” 그 순간 거짓말처럼 당선 전화가 왔고 그는 참았던 울음을 토해냈다. 눈을 감는 순간 자신의 정체성이 소설가이길 원하는 게 어떤 마음인지 쉽사리 짐작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정도로 간절하기에 이런 결정을 내렸으리라 생각해 볼 뿐이다.
‘백 오피스’는 단숨에 읽혔다. 호텔리어 강혜원, 행사 기획사 직원 임강이, 대기업 대리 홍지영이 호텔에서 개최하는 대형 행사를 둘러싸고 분투하는 이야기다. 세 여성이 업무를 추진하는 과정, 동료와 벌이는 복잡하고도 팽팽한 신경전, 가차 없는 조직의 논리가 사실적이면서도 속도감 있게 그려졌다. 현실적이고 밀도 높은 ‘오피스 소설’이 탄생했다는 반가움과 함께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하는 이들이 많은 때다. 지난달 열린 청강문화산업대 졸업식에서 용접노동자 천현우 씨(32)가 한 축사가 화제가 됐다. 그는 “살다 살다 졸업 축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며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풀어 놓았다. 한때 용접하는 자신이 패배자 같아 부끄러웠고, 잘못한 것 없이 열심히 일하는데도 사람들의 시선에 위축되는 게 억울했다고. 고민 끝에 그가 도달한 결론은 이랬다. “나는 용접을 좋아한다는 것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에 타인의 평가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는 당부했다. “쇠와 매연, 공장과 작업복의 회색지대가 저의 세계였듯, 여러분 역시 자신의 세계가 있을 거예요. 자신의 세계를 부끄러워하지 않길 바랍니다. 선명하게 그 세계를 완성해 나가길 바랍니다.” 이어 “까고 말해서 덕질하자는 거죠”라고 유쾌하게 덧붙였다.
자신의 결정으로 새로운 시작을 한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출발선을 떠났다면 일단 나아가라고. 혹여 지친다면 에너지를 뿜어내던 순간의 자신 혹은 그런 이들을 떠올려 보라고. 기자는 힘을 얻고 싶을 때면 수상자들의 당선 소감을 종종 읽곤 한다. 감사한 사람들의 이름을 끝없이 나열하는 소감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이야기 말이다. 특히 연극상, 신춘문예를 포함한 문학상 수상자들의 소감이 그렇다.
“아파도 슬퍼도 글을 썼던 순간의 감각이 지금도 제 몸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이를 기억하며 열심히 밥을 먹듯 시를 쓰겠습니다. 지쳐 쓰러지더라도 종이 위에 끈질기게 머무르겠습니다.”
2018년 본보 신춘문예에 시로 당선된 변선우 씨(29)의 소감이다. 계속 시를 부여잡고 있을 그에게 감사하며, 고되고 벅차도 자신이 택한 길을 가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그 간절함, 그 열정이 조금이라도 전달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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