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대만 집권 민진당은 22명의 지방자치단체장을 뽑는 선거에서 고작 6석을 얻으며 참패했다. 15석을 얻은 야당 국민당은 기세등등했다. 2020년 1월 대선을 불과 1년 2개월 남겨둔 터라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의 재선은 어렵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가 민진당 대표에서 물러나는 승부수를 던졌는데도 지지율은 바닥을 기었다.
수세에 몰린 차이 총통은 정작 역대 최다 득표를 얻으며 재선에 성공했다. 승리의 일등공신은 역설적으로 중국이었다. 홍콩 당국이 홍콩 범죄자를 중국 본토로 송환할 수 있는 ‘범죄인 인도법(송환법)’을 도입하려 하자 2019년 6월부터 홍콩에서는 거센 반중 시위가 일어났다. 모진 탄압을 받는 시위대를 보며 대만에서는 ‘홍콩의 내일은 대만’이란 공포가 커졌다. 그 두려움이 반중을 내세운 차이 총통에 대한 지지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대만 언론은 중국이 그가 미국 코넬대와 영국 런던정경대에서 받은 법학 석·박사 학위가 가짜라는 등의 거짓 정보를 퍼뜨리며 뒤에서 낙선을 부추겼다고 보도했다. 눈엣가시인 그를 몰아내려고 저열한 네거티브 공세를 벌이다 된통 역풍을 맞았다. 그의 재집권 후 중국은 군사 경제 외교 등에서 전방위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이로 인해 올해 11월로 예정된 대만 지방선거에서도 민진당의 낙승이 예상된다는 평이 나온다.
같은 일이 2022년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졌다. 행정 경험이 전무한 희극인 출신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2019년 집권 후 경제난, 방역 실패, 탈세 의혹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2020년 1월 올렉시 혼차루크 당시 총리까지 “대통령의 경제 개념이 유치하다”고 노골적인 뒷말을 했다. 직접 발탁한 총리가 이렇게 평했으니 국정 장악력은 안 봐도 비디오다.
이랬던 그는 러시아의 침공을 계기로 국민 영웅을 넘어 자유세계의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지난해 12월 30%대였던 지지율은 침공 직후인 지난달 26, 27일 조사에서 91%로 치솟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암살 위협과 미국의 대피 권유에도 “조국을 지키겠다”며 결연한 항전 의지를 보여 세계를 사로잡았다. “젤렌스키 정권은 약물에 중독된 신(新)나치주의자들”이라는 푸틴 대통령의 흑색선전 또한 그를 더 돋보이게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유대계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부와 친척들이 유대인 대학살로 숨진 가족사도 수차례 밝혔다. 나치라면 누구보다 치를 떨 그가 신나치 수괴라니 이런 어불성설이 있을까.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군과 친러 반군이 2014년부터 교전 중인 동부 돈바스에서도 “나치주의자 정부군이 러시아계 주민을 대상으로 인종학살을 자행해 시신이 넘쳐난다”는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거듭했다. 러시아계 주민 보호라는 침공 명분을 만들기 위해 억지를 부린다는 걸 세상이 안다.
둘을 상대한 중국과 러시아는 같은 오판을 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서서히 고사시킬 수 있는데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기만 하니 상대방 또한 죽기를 각오하고 덤벼드는 것이다. 집권 초 젤렌스키 대통령은 돈바스 내전에서 잡은 러시아계 포로를 반군의 정부군 포로와 교환하는 등 러시아와 대화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또한 적극 추진하지 않았다. 첫 집권 때의 차이 총통 역시 아예 ‘대만 독립’을 주창한 민진당 출신의 첫 총통 천수이볜(陳水扁)에 비해 온건한 대중 정책을 폈다. 이랬던 둘을 굳이 자극하고 들쑤셔 각각 반러, 반중 투사로 만들었다.
양국의 행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 또한 싸늘하다.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어느 편도 들지 않던 중립국 스웨덴 핀란드 또한 나토 가입을 거론하며 서방으로 완연히 기울고 있다. 전 세계를 조공국 취급하는 중국의 폭주로 미국 퓨리서치센터가 지난해 세계 17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70%가 “중국이 싫다”고 했다. 이런 현실에 귀 기울이지 않고 ‘서방이 우리를 악마화했다’는 타령만 거듭하면 곳곳에서 제2, 제3의 젤렌스키와 차이잉원이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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