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4월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는 신생 중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절호의 다자외교 무대였다. 이런 중국을 대만의 장제스 총통이 가만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홍콩 카이탁공항의 직원을 매수해 중국 대표단이 탄 비행기에 폭탄을 심었고, 외교관과 기자 11명이 공중 폭발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거기에 저우언라이 총리는 없었다. 어디선가 위험 첩보를 전달받고 다른 비행기를 탄 덕분이었다.
냉전기 미국이든 소련이든 어느 블록에도 가담하지 않은 제3세계 국가들의 비동맹 회의에서는 공산주의 중국에 대한 의심, 적대적 기류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연단에 오른 저우는 준비한 메모를 치워놓고 즉석연설을 시작했다. “중국 대표단은 공통점을 찾으러 온 것이지, 불일치를 만들러 온 게 아닙니다.” 대만 문제 같은 분열적 이슈도 피했다. 박수가 간간이 터져 나오더니 연설을 마칠 땐 참석자들이 기립 박수로 환호했다.
당시 저우가 제시한 것이 ‘평화공존 5원칙’(주권·영토 존중, 상호 불가침, 내정 불간섭, 호혜평등, 평화공존)이다. 이 5원칙은 반둥회의가 결의한 ‘평화 10원칙’의 골간이 됐고, 오늘날까지 중국이 말끝마다 내세우는 외교의 기본 원칙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매력외교’를 펴던 가난한 신생 국가에서 세계 패권을 노리는 강대국으로 변신한 지금, 중국이 표방해온 외교 원칙은 한낱 외교적 수사로 전락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중국 외교를 시험대에 세웠다. 시진핑 주석은 지난달 베이징 겨울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브로맨스’를 과시하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확장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미 우크라이나 국경에 10만 병력을 배치해 놓은 푸틴의 전쟁 명분에 대한 공개적 지지였다. 그 보답이었을까. 푸틴은 2008년 베이징 여름올림픽 초반 조지아를 침공했던 것과 달리 이번엔 올림픽이 끝나길 기다렸다.
중국도 푸틴의 도발을 놓고 꽤나 고심한 듯하다. 푸틴이 베이징을 떠난 뒤 시진핑을 비롯한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이 한동안 모습을 감췄다. 외신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놓고 비공개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는 관측을 내놓았다. 그래서 나온 결과는 원칙과 이익의 기괴한 조합이었다. 중국은 ‘주권과 영토의 존중’을 내세우면서도 “러시아의 안보 우려를 이해한다”며 주권 유린을 묵인했다. 반미(反美) 연대를 위해 원칙의 훼손도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국은 러시아의 침공에 전혀 대비돼 있지 않았다. 미국이 러시아의 침공 준비에 관한 비밀정보를 여러 차례 전달했지만 중국은 번번이 묵살했다. 오히려 미국의 경고를 ‘긴장을 부채질하는 가짜뉴스’라고 비판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주재 중국대사관은 갈팡질팡했다. 각국이 자국민 철수에 나섰지만 중국은 막판까지 머뭇거리다 그 시기를 놓쳤다. 오성홍기 부착을 권고했다가 이틀 만에 신분을 드러내지 말라고 말을 바꾸기도 했다.
이런 한심한 대응은 시진핑이 과연 푸틴의 속내를 제대로 읽었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침공의 공모자’라는 낙인까지 찍히면서 러시아를 감싸는 중국의 태도를 볼 때 푸틴이 귀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푸틴이 조지아 침공과 크림반도 병합 때처럼 속전속결의 국지적 작전이라고 얘기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뭐였든 중국은 책임 있는 대국의 자격을 잃었고, 자국민 안전조차 챙기지 못한 비정한 외교는 두고두고 지탄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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