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인당 국민소득(GNI)이 처음 3만5000달러를 돌파했다. 6·25전쟁 직후인 1953년 67달러에서 68년 만에 무려 525배로 커졌다.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고속 성장이다. 한국은행은 몇 년 내 4만 달러 달성도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에서 “20년 뒤 한국에 1인당 국내총생산이 2배 이상 뒤처질 것이며 G7 회원국 자리가 한국으로 바뀌어도 할 말이 없다”는 경제학자의 경고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한국은 1994년 처음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일본이 4년, 홍콩과 싱가포르가 5년 만에 넘었던 ‘2만 달러 벽’은 12년이 지난 2006년에야 간신히 넘었다. 외환위기를 시작으로 닷컴 버블 붕괴, 신용카드 대란이 줄줄이 발목을 잡았다. 선진국 대접을 받는 3만 달러 돌파도 글로벌 금융위기로 진퇴를 거듭하다 2018년에야 가능했다. 인구 5000만 명 이상 국가 중 3만 달러를 넘긴 곳은 일본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6개국뿐이다.
▷그런데 내 호주머니 사정은 왜 이러냐는 불만이 나올 법하다. 국민소득은 개인뿐 아니라 기업과 정부가 벌어들인 소득까지 포함한 개념이다. 이들 몫을 빼고 개인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은 1인당 가계총처분가능소득(PGDI)을 봐야 한다. 재작년 PGDI는 1인당 국민소득의 56% 수준이니 3만5000달러 중 개인이 실제 손에 쥐는 돈은 1만9600달러다. 1인당 국민소득은 평균값이어서 소득불평등도 반영 못 한다. 자영업자와 서민들이 느끼는 체감 소득은 더 차이 날 수밖에 없다.
▷달러 표시 국민소득은 국가 위상의 바로미터이기도 하지만, 정책 목표가 되는 순간 외환위기로 돌아오기도 한다. 김영삼 정부 시절 임기 끝까지 1만 달러 달성을 유지하려 원화 강세 정책을 썼는데 당시 한은은 환율을 유지하려 사상 처음 선물환까지 투입했다. 수출 기업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정부는 ‘뼈를 깎는 노력’을 주문했고, 적자가 커진 기업들이 들여온 단기 외채는 외환위기의 빌미가 됐다. 그런데도 이후 대선 후보들은 거의 빠짐없이 국민소득 목표를 정책 공약으로 내걸었다.
▷한은은 4만 달러 달성 낙관론을 폈지만 기대보다 우려가 많다. 잠재성장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 데다 나랏빚 급증과 글로벌 인플레이션 우려로 차기 정부의 재정·금융정책 손발은 사실상 다 묶여 있다. 남은 길은 노동개혁과 규제혁파, 첨단인재 양성으로 기업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길인데 정치권은 거꾸로 입법 경쟁에 혈안이다. 일본은 3만 달러를 돌파한 1992년이 ‘잃어버린 30년’의 시작이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