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투표율 37%지만 불투표 유혹 여전
기권은 존중받지 않아도 된다는 인정일뿐
국가 운명도 결국 한 표에서 시작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투표는 권리이자 의무라는 소리를 지겹게 들어왔다. 그런 주입교육에도 불구하고 선거날 기권의 유혹은 만만치 않다. 첫째는 간절히 당선을 기원할 정도로 맘에 드는 후보가 없다는 것이며, 둘째는 내 한 표가 선거 결과에 무슨 영향을 미치겠는가 하는 냉소적 태도가 나름의 기권 사유다. 유권자의 약 37%가 참여한 사전투표를 건너뛰었다면 이 글을 읽어보고 기권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받기 바란다.
참정권의 확대는 민주주의 발전의 전제조건이다. 주권자인 국민의 차별 없는 참정권을 이루기 위한 역사 과정에 두 가지 사건이 잘 알려져 있다. 1913년 에밀리 데이비슨은 영국의 유서 깊은 경마대회 도중 국왕의 말 앞으로 뛰어들어 치명적 상처를 입고 사흘 만에 사망했다. 그녀는 ‘여성에게도 참정권을…’이라는 메시지를 영국인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경마 트랙으로 스스로 뛰어들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5년 뒤에 30세 이상의 영국 여성들이 참정권을 갖게 됐고 이후 확대됐다.
1965년 3월 미국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흑인들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주지사를 만나기 위해 몽고메리까지 86km의 행진을 시작했고 경찰은 시위대를 폭력으로 진압했다. 이 사건은 이후 ‘피의 일요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틀 후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주도한 2차 행진이 다시 이어졌고 여기서 인권운동가 제임스 리브가 살해되었다. 수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3차 행진이 예정되자 여론의 지지가 확산되었다. 이에 린든 존슨 대통령은 연방군을 동원해 3월 21일 3차 행진을 호위하였고 시위대는 몽고메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셀마 행진은 그해 8월 투표권리법이 통과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광복 이후 제헌국회 선거법은 일본에 부역한 일부와 수형자를 제외하곤 21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투표권을 부여했기 때문에 보통·평등선거의 원칙을 달성하기 위한 희생은 없었다. 그렇지만 유권자의 권리를 확보하려는 노력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1967년 베트남 파병 군인들과 독일 간호사, 탄광 근로자 등을 위한 해외부재자투표 제도가 만들어졌지만 1972년 유신체제하에서 폐지됐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하고 1997년 재외국민들이 헌법소원을 제기한 결과 2007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고 2012년 19대 총선부터 재외국민투표가 다시 가능해졌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참정권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 새삼 확인된 것이다.
1일부터 4일까지 444척의 선박에서 선원 3267명을 대상으로 20대 대선 투표가 실시됐다. 선상투표에서 선거인의 비밀투표를 보장하기 위해 무게가 최소 100kg이 넘는 대형 실드팩스라는 기계를 사용한다. 선원들은 투표 후 팩스를 이용해서 수신 시·도선관위로 투표지를 보내면 실드팩스가 투표지를 밀봉하여 수신하는 방식이다. 총유권자 4420만 명 중 겨우 3000여 명에 불과한 유권자를 위해 값비싼 특수팩스를 운용하는 이유는 예외 없이 모든 유권자들의 투표권이 보장돼야 하기 때문이다.
참정권 확대의 역사는 희생과 끊임없는 노력이 수반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투표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며 참정권 확보를 위해 노력한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다. 혹자는 기권을 통해 정치적 불만을 표출하겠다고 말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기권은 나를 존중해주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일 뿐이다. 기권은 누가 대통령에 당선돼도 상관이 없고 다른 사람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종속적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대다수의 국가들은 주말을 선거일로 지정하거나 주중에 시간을 내서 투표하도록 정하고 있다. 미국은 화요일, 영국은 목요일이고 캐나다는 월요일이 선거일이다. 유럽 대륙의 국가들은 대부분 일요일을 투표일로 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주중 선거일을 법정공휴일로 정한 나라는 드물다. 투표 참여에 소요되는 시간이 대충 한 시간 정도라고 계산할 때 하루를 쉬면서 이 정도 비용을 치르는 것은 공휴일 혜택을 누리는 데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아닐까 싶다.
선거 당일 게으름을 떨며 소파에 누워 TV를 시청하고 있자면 온통 선거뉴스뿐이고 투표독려 자막이 TV 하단에 계속 흘러간다. 신경에 거슬리고 마음이 찜찜하다. 그럴 바에야 3월의 봄기운을 느끼면서 투표장을 다녀오는 것이 산뜻하다. 투표를 마치고 투표장을 나설 때 왠지 뿌듯함이 느껴진다.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내가 한몫을 했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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